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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주당 묘엄 스님 행장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배우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스승이 계셔서 더욱 청정한 도량, 세속의 때를 벗고 승가의 家風을 익히느라 도량 곳곳에 수행의 향내가 가득한 도량, 수원 광교산 자락 봉녕사 승가대학의 학장이자 금강율원의 律主로서 이 시대의 한국불교 비구니 대강백이시자 청정율사이셨던 世主妙嚴스님.

스님께서는 1931년 경남 진주에서 星山李氏인 아버지 李讚浩와 어머니 車点伊사이에 2녀 중 차녀로 출생하셨는데, 어머니가 꿈에 어느 절에 갔다가 한 노인이 접시에다 복숭아 두 개와 하얀 연꽃, 붉은 연꽃을 담아 와서 주기에 복숭아는 먹고 버리면 그만이다 싶어 하얀 연꽃 한 송이만 받아 집으로 가져와서 꽂는 태몽을 꾸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스님이 태어나시기 8년 전에 이미 出家 得度하시어 1954년부터 60년대 초까지 이 땅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불교 정화운동의 선봉자이며 주역이셨고 통합종단 초대총무원장, 2대 종정을 지내신 청담순호(淸潭淳浩)스님이십니다.

일제강점기이던 시절 스님은 진주 요시노(吉野)공립초등학교 (現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던 무렵 흉흉한 당시 사회상황으로 인해 아버지 순호스님이 수행하고 계시던 경북 문경 대승사로 피신을 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철없던 15살 소녀가 세속을 떠나 오롯한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곳 대승사에서 스님은 청담스님의 도반이셨던 근래 한국불교의 거목 성철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다생겁의 善根力 때문이었는지 다양한 비유를 들어 불교에 대한 근본 뜻을 가르쳐 주시며 “내가 아는 것을 너에게 다 가르쳐 주겠다.” 는 성철스님의 말씀에 발심이 되어 보름 만에 세속의 꿈을 접고 스스로 출가 결심을 하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스님은 1945년 5월 단오날 당시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며 비구니 선객으로서 발심납자들의 귀감이시던 윤필암 입승 월혜스님을 은사로, 성철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게 됩니다. 성철스님은 스님에게 사미니계와 함께 화엄경의 세주묘엄품에서 따온 妙嚴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시고 僧衆계의 큰스님이 되라고 격려해주셨고 이후 스님께서 승려생활을 하는 내내 정신적인 가르침과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한편 청담스님의 생사대사 법문에 발심출가한 월혜스님과 師弟之緣을 맺게 된 것은 진정 佛家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眞俗不二의 인연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님은 윤필암에서 스님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행해율의를 배우고, 대승사 큰절을 왕래하면서 성철스님께 한국역사 등을 배우고 청담스님께는 수행자로서 대중들 속에서 바르게 처신하며 인욕하는 법을 배우는 등 우리나라 불교계의 대표적인 큰스님이셨던 어른들께 자상한 가르침을 받으시는 복을 누리셨습니다.

한번은 윤필암 전대중이 큰스님들로부터 능엄주 功德說 법문을 듣고 신심이 頓發하여 철야용맹정진을 했는데 스님은 눕지도 자지도 않고 21일 동안을 꼬박 서서 주력을 하며 견뎌내어 무사히 기도 회향을 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하루 108독 능엄주 주력 수행으로 時空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시고, 만성 배탈병이 낫는 神力을 입기도 하셨습니다.

재 위에서 피워오르는 목향 한 줌의 소리(香聲)를 듣는 것을 좋아하셨던 스님은, 옛 조사 스님들의 가풍과 같이 가난한 것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기던 安貧樂道의 꿈같던 윤필암 시절을 보낸 이후, 1946년 불교정화운동과 조계종의 건립으로 이어지는 한국현대불교사의 이념적 실천적 터전이 된 봉암사 결사,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 며 시작된 이 결사에 비구니 스님으로는 드물게 동참해 봉암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께 “만법은 하나로 돌아갔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라는 화두를 받아 참선수행을 하시면서 조사스님들이 철저히 공부하신 사상을 주입받으셨습니다. 스님께서 반세기 이상을 강사로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걸어오셨던 원동력이 바로 봉암사에서 큰스님들께 엄격한 수행교육을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어도 정신은 살아있던 봉암사 시절을 회고하며 가장 중답게 살 던 때라고 하시며, 요즘 중노릇하는 이들이 좋은 환경 속에서도 道心을 내지 않고 방일함을 경책하셨습니다.

봉암사에서 慈雲화상을 계사로 당시 처음으로 式叉摩那尼戒를 수지하게 되신 스님은, 1950년에는 통도사로 내려가 慈雲스님께 계율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미니율의와 비구니계본, 범망경 등을 배우시게 되었는데, 조선불교의 쇄락과 왜색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이 생기면서 승가를 지키던 청정계율이 허물어지고 있던 당시, 계율은 소수의 스님들에 의해서만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었고, 그러한 승단에서 律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중흥시킨 중흥조가 바로 律師 자운스님이셨습니다. 스님은 이 때 자운스님에게서 시대의 혼돈에 굴하지 않고 청정승단을 회복하고 정법을 구현할 율맥을 잇는 비구니 율사로서의 터전을 마련하셨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신 후 7여년 동안 해방과 전쟁이라는 커다란 시대적 격동기를 겪으시면서도 윤필암, 해인사 국일암, 동래 금화사, 월내 묘관음사, 창원 성주사 등지에서 수선안거를 하시며 흔들림 없는 구도의 길을 이어오시다가, 부처님의 교리나 조사어록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구니강원이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성철스님의 소개로 동학사에 계신 대강백 운허스님을 찾아가서 비구니로선 처음으로 경전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가난하던 시절 보리동냥, 고추동냥 등 탁발을 다니면서도 책 보기를 거르지 않으셨고, 운력이 많아 책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에는 사람들이 버린 깡통을 엎어놓고 기다란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찌꺼기 촛농 모은 걸 엎어놓고 밤새 책을 읽고 나면 얼굴과 콧구멍이 새까맣게 변한 서로의 모습을 보며 새벽하늘 아래서 도반 스님들과 산천이 떠나가도록 웃으셨다고 합니다.

1956년 동학사에서 사교과를 수료하고 경봉 큰스님으로부터 傳講을 받았고 이후 범어사, 동학사, 봉선사, 부산 금수암, 진주 도솔암 등지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장소를 옮겨가며 운허스님의 문하에서 공부를 계속하시던 스님은 7여 년간 맹자, 논어, 치문부터 一代時敎를 다 마치고 운허스님에게 傳講을 받게 됩니다. ‘훌륭한 法師가 되겠다’던 스님의 원력과 같이 1959년 한국 최초의 비구니 전문강원인 동학사에서 최초의 비구니 강사로서 학인들을 가르치는 역사의 첫 발걸음을 놓으시게 됩니다. 그 당시만 하여도 비구니는 가르치지도 않았거니와 비구니 강원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비구니가 강사를 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내던 때였습니다.

1961년 2월에는 통도사에서 정화종단 이후 처음으로 비구니에게 구족계를 주는 법석이 열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5~60여명의 스님들과 함께 자운스님을 계사로 처음으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시게 됩니다.

이후 스님께서는 절집에서의 경전공부를 어느 정도 마쳤지만 현대식 교육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혀 불교를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가르쳐야겠다는 소신을 가지고 마산대 불교학과를 수료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2학년에 편입하여 3년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또 운문사 비구니강원에 강사로 초빙되어 계시면서 선, 교, 율(禪敎律)을 당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고승들인 청담, 성철, 운허, 자운 스님 밑에서 배우며 21년간 涉獵해오신 불교의 전통적 수행이력과 新舊학문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시던 와중 1971년 어느 날, 이론적으로는  앞뒤를 가릴 수 있으나 진정 경전에는 없는 내 소리, 내 藏經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알아야 된다는 내적인 갈증과 함께 참선을 해야겠다는 강한 미련을 떨쳐버리기 어려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거처도 정하지 않은 채 아무 대책도 없이 같이 나온 40여 명의 절집식구들과 함께 한동안 많은 고생을 하며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곳이 수원 봉녕사였습니다.

봉녕사에 정착하면서 선원을 개설할 요량으로 맨 처음으로 선방을 지어 4년간 정진에 힘쓰시던 스님은 스님의 德化 아래 운집하는 초발심 납자들이 많아지고 되면서 또다시 가르치는 직분을 피할 수 없게 되시면서 1974년도에 강원을 설립하시고 강주에 취임하시게 됩니다.

40여년 만에 국내 굴지의 비구니승가교육의 요람으로 변모된 奉寧寺의 傳統과 歷史 가운데는 스님의 계율과 수행이 조화된 승가 본연의 수행자를 키우고자 하는 人才佛事의 大願力이 깃들어 있습니다. 비가 새는 법당 건물과 요사채 한 동 밖에 없는 작고 쇠락한 고찰이던 봉녕사 주변의 논밭을 매립하여 선방을 만들고 강당을 짓기 시작하여 현재 108평의 웅장한 대웅전과 건평이 300여평이 넘는 堂宇가 네 채와 최신식 도서관 건물이 들어선 대가람으로 변모시키셨으니 그 동안 학인들을 가르치시며 눈물과 땀으로 도량을 일구시느라 애쓰신 스님의 노고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후학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과 함께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河海와 같으신 스님은 평소에는 자상하셨지만 학문에 임할 때는 엄격하시기가 그지 없으셨는데, 공부의 방향을 잘 잡아서 사상을 정립하고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배워야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바르게 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봉녕사 강원 개원 이후 40년간 학장을 맡으시며 현재까지 39회 8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한국 비구니교단의 미래를 밝히는 棟樑들을 양성해 오신 스님은 강원의 교가를 직접 작사하는 남다른 애정을 보이셨으며, 팔십 노구에도 화엄경 강의와 율원강의를 맡아 하시는 솔선수범을 보이셨습니다.

1992년 5월에는 도서관 ‘소요삼장’ 개관식과 아울러 일연, 성학, 혜정, 대우, 일운스님 등에게 전강식을 거행함으로써 운허스님의 강맥을 잇게 하였으며, 교단 내에서 교학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현재 일연스님을 비롯한 9명의 전강제자가 배출되어 강단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또 스님은 1981년 자운스님으로부터 전계를 받으시고 비구니 율맥을 이으셔서 비구니구족계 수계산림 교수사, 갈마아사리를 역임, 조계종 계단위원으로서의 중심적 역할을 계속해오셨습니다.

계(戒)는 안으로는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고, 밖으로는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부처님이 지켜라 해서 지킬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출가자가 본인 스스로가 느껴서 발심하고 행하는 것이 출가 정신이라고 늘 강조하시던 스님은 1999년 세계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개원함으로써 持戒정신이 점점 엷어져 가는 이 시대에 한국 승가의 수행풍토를 진작을 위해 새로운 장을 마련하시고 ‘以戒爲師’의 부처님의 유훈을 받들어 계율정신의 연구와 실천를 위한 제자들의 그 신심과 원력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율장 정신의 회복과 전승, 한국 승가의 미래를 위해 대단히 고무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그 전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본보기가 되고 있는 금강율원은 현재까지 대우스님, 적연스님 등 7명의 전계제자와 4명의 율사들이 배출되어 戒壇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스님은 2007년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개최한 ‘승가의 여성불자 역할’ 국제회의에 참석하셔서 「한국 봉녕사 비구니율원의 구조와 교육과정」논문 발표를 통해 한국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공헌하셨습니다.

2007년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 스님께서 1957년 운허스님께 전강 받으신 이래로 한국비구니 승가교육을 이끌어 오신 반세기를 기념하는 ‘世主妙嚴 主講 50주년 기념 논총’을 봉행하여 스님의 거룩한 발자취를 되새기게 하였습니다.

또한 2007년 10월에는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종정이신 법전스님으로부터 종단 사상 처음으로 비구니 스님에 대한 최고 지위인 명사법계를 품서 받으시고, 2009년 조계종 계단위원회로부터 비구니 전계화상으로 위촉되시어 명실공히 수많은 출가자들의 模範이자 표상으로서 존경을 받으시게 됩니다.

성철스님의 禪과 자운스님의 律과 운허스님의 經을 이어받으시면서 당대고승들로부터 선.교.율 삼장을 모두 전수받으신 비구니계의 보기 드문 어른으로, 척박했던 시대 속에서도 처절한 수행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傳佛心燈의 법맥과 함께 하신 한국불교 현대사의 산 역사와 같은 분이셨던 스님.

부처님 말씀을 배우기 어렵고 행하기도 어렵고 가르치기는 더욱 어려운데 봉녕사에서 강원과 율원을 세우신 후 60여 星霜을 후학들을 위해 아낌없이 가르치시는 일에 그 원력을 다하시며 知行合一의 경지에서 逍遙하시던 참 스승님.

四生의 慈父이신 여래의 가르침을 받들어 청정한 승가를 확립하고 출가정신을 등불 삼아 정법을 실천하고 생사해탈을 구하는 여법한 수행자의 삶 그대로를 늘 한결같이 보여주시던  스님의 청안한 모습이 맑은 法香이 되어 늘 스님을 존경하고 흠모하여 따르는 제자들의 마음 깊이 새겨져 오래도록 간직될 것입니다.

2011-12-02 / 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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