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살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공부를 하다 보면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과 하나가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돕지 않을 수 없어요. 자비보살행이 저절로 물씬 물씬 나오게 되지요. 어렵게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소우주라고 하는 이 몸을 보세요. 이 몸은 봉사행, 자비보살행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이 입이 봉사해서 머리카락도 만들고 손톱·발톱도 만들고, 발이봉사해서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이 손과 머리가 봉사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봉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제 편한 대로 살려고 하니 온갖 불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코·입이 각각일지라도 한몸이고, 그 각각이 서로 돕고 봉사해서 이 몸을 부지하듯 대자연도 마찬가지예요.
저 산과 물과 사람과 사람이 각각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실로는 둘이 아닌 한 몸입니다. 내 몸 안의 눈·코·입이 서로서로 봉사해서 살아가듯 돕고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니 빈부간, 계층간, 나라와 나라간 갈등이 양산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듯이 이 세상은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는 연기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한 몸인데, 언제부터인가 자연과 내가 둘이라는 잘못된 편견이 생겨 온갖 불행을 빚어냈습니다. 둘이 아닌 그 도리를 알게 하여 저절로 자비보살행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마음을 쉬면, 매사 걸리는 게 없으며 자연스레 건강해집니다. 병의80%가 마음에 달려 있지요. 마음을 불편하게 쓰면 건강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마음만 바로 닦아 놓으면 지진이 나서 야단이 나도 극락이 바로 거기에 있는 도리가 나옵니다.
불교가 바로 그 마음 닦는 도리예요. 세상사는 동안 육체를 잘 다스리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수행자일수록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고, 건강하게 살면서 자비 봉사행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수행자야말로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근원입니다. 사람들의 얼굴 생김이 다르듯 수행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앉아서 참선하는 게 최고다 하는 것도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어요.
경전이든 염불이든 사경이든 행주좌와 어묵동정 혼신을 다해 열심히 하는 데서 선(禪)이 나오고‘사는 길’이 나옵니다.
기본적으로 공(空)의 도리와 이 세상은 수많은 인연들이 모여서 돌아간다는 연기법을 알아야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고, 우리 몸을 생각해 봅시다.
입과 항문이 각각 떨어져 있는 듯 하지만 실로는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고 저쪽이 있으면 이쪽이 있기 마련입니다.
입이라 해도 맞고 항문이라 해도 맞고, 입이라 해도 맞지 않고 항문이라 해도 맞지 않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나타나는 것처럼 수행을 하면 한 만큼 공부의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 수행했다 해도 별다른 진전이 없고, 인격적인 향상
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나다’하는 상 때문입니다. 나(我)라는 상에 파묻혀 살면 백 날 천 날 화두를 들고 있어도 공부에 진전이 없습니다.
나를 버리면 이생이 바로 극락인 도리가 나옵니다. 나와 남의 경계가 무너진 바로 그 자리가 극락입니다.
* 만불신문 118호 (2004.10.16)에서 옮겨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