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법문이라고 하면 말로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법문은 말이 아닙니다. 말이라는 기구를 통해 뜻을 전달할 뿐이지 그 뜻이 잘 전달됐다면 말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부대중들을 위해 항상 귀로 들을 수 있는 법을 설해 오신 부처님께서 어느날 아무 말 없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무슨 말씀을 하실 건가’ 하고 귀를 기울였으나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대중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꽃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섭존자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결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둥근 달이 있는데 그 달을 못 보니까 그것을 보게 하기 위해 가리키는 손가락이 바로 법문입니다. 경전을 아무리 달달 외우더라도 소용없습니다. 불문(佛門)에 들어왔으면 부처님 뜻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달마 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법을 전하러 갔었을 때 일입니다. 그 당시 중국에는 이미 많은 경전이 있었고, 사찰과 승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부처님의 참된 뜻은 사람 사람마다 자기 마음을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고, 그 마음을 보도록 가르친 것이 불교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보지 않고 경전이나 불상만 쳐다보고 자기 마음을 닦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전이나 불상에 집착하는 헛된 착각에서 벗어나 일상을 충실히 하는 것이 바로 불교라는 말입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일상생활을 해 나가되 다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그 감정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결국 고통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부처님하고 중생이 똑같지만, 중생은 번뇌망상이 많으므로 수행을 통해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녹여야 한다고 결론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대로 10년 전에 공부를 시작했다면, 지금쯤 번뇌망상이 다 녹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있습니다.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에 번뇌망상을 녹여야 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번뇌망상은 본래 없는 겁니다. “저는 많은 데요”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한 제자가 선지식에게 “번뇌망상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지식이 껄껄 웃으며 “미친 놈아”라고 답했습니다. 다시 제자가 “번뇌망상이 많아 그 번뇌망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데 왜 미친놈이라고 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지식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니 그렇다. 허공에 페인트칠을 해 봐라. 허공에 아무리 칠한들 칠해지느냐”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해 감정에 사로잡히면 현실이 안 보입니다. 현실을 볼 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생각을 털어 버리고 현실을 바로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몸은 현실에 있는데 머리속에는 지나간 과거, 오지 않는 미래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화두(話頭)는 “지금 이 자리를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불법이고 진리 그 자체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 밥할 때는 밥하는 모습, 일 할 때는 일하는 모습, 항상 그때 그때 목전(目前)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이라고 특별한 모습, 특별한 장소가 따로 없습니다. 목전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10년을 한다면 10년 후에는 자신의 얼굴이 확 달라짐을 느낄 것입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15호(2004년 9월 4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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