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가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
요즘도 4성 계급이 뚜렷한 인도에서, 그것도 2,600여 년 전에 목숨을 내건 부처님의 이 선언을 우리는 아주 의미 깊게 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아(我)’가 무엇이길래 존귀할까요? 삼계가 고통 속에 있어서 나의 고(苦)를 해결한 것이 불교라고 할 때, 그럼 왜 ‘고’인가요?
여러분 죽음의 길을 가고 싶으세요? 늙고 병들어 죽고 싶은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이런 고통은 태어남 자체가 원인이어서 날 때부터 고통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죽음 뒤의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뒤의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라면 두렵지 않을텐데 알지 못해서, 무명(無明)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 무명은 윤회의 원인입니다. 무명만 타파되면 괴로움이 소멸합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은 마음을 닦아 무명을 밝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기에 마음 한번 바로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아(我)는 마음이요, 불성이자, 선(禪)입니다. 그때 그때 설명하기 위해 구분한 것입니다. 마음을 밝혀서 알고 보면 마음이란 원래 밝아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이 마음을 닦으라는 말도 맞지는 않습니다. 닦을 것도 없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에 대해서는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點心) 법문을 할까 합니다.
당나라 때 덕산 스님은 금강경의 대가로 성은 주가였는데, 주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답니다. 자신의 금강경 실력에 자만하여 당대 유명한 스님과 법거량을 하러 가는 도중에 떡 파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파가 “내가 묻는 질문을 대답해 준다면 스님께 떡을 보시하겠소.”라고 말하자, 출출하던 덕산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금강경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물어보시오. 다 답해 주리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금강경의 한 구절)이라 하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 하시오?” 이 한 마디에 덕산 스님은 떡 파는 노파가 떠날 때까지 한 마디도 못하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마음의 점을 찍으시겠습니까? 이 마음이란 닦을 것이 없어서 닦는다는 말도 허물이지만 마음을 찾고 밝히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란 제목의 동요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마음은 이처럼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것입니다. 불성이라고 표현되는 이 마음을 ‘여래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마음이 선악과 시비 등이 나눠지지 않은, 구분 안 된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원래 하나이건만 홀연히 일어난 무명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이‘부처 마음’은 윤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아직 공부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마음을 밝히기 전에는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광석에서 금을 제련하는 과정이 참선이라고 한다면 먼저, 우리는 큰 믿음을 내야 합니다. 이 대신근(大信根)이란 선지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하고 점검함으로써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선에 깊이 천착하여 나고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이 되길 바랍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07호(2004년 5월 8일자)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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