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사람들이 선이란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선이기에 부처이고, 불성(佛性)이란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로 존재하고,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如來)를 본다.”고 설하셨습니다. 존재가 연기이자 법이며, 여래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선이고 부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 참선한다는 생각을 내면 틀린 소리일 뿐 아니라 허송세월만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존재 자체가 선이요, 부처란 사실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듣고 보는 마음과 몸뚱이도 부처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에 똑같은 작용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과 같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 입니다. 그것은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우리 모두도 부처와 똑같아집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연기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치신 법은 곧 연기이자 공(空)이기에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이자,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입니다. 이를 철저히 깬 것이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연기(中道緣起)를 가장 정확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간화선 수행자들 중에는 화두를 정신통일이나 의심하기 위해 드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화두는 의심하기 위한 것도,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옛 조사스님들은 모르는 것을 의심하라 했지, 의심하기 위해 화두에 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한 화두는 타파할 수 없습니다. 주객(主客)으로 나뉜 내 의식을 한방에 깨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이것이 공부이고 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지식의 말을 통해서 바로 깨달으면 됩니다. 깨치라고 화두를 제시하는데 못 깨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깨치게 하는 방법이기에 그냥 놔두는 것뿐입니다. 《선요(禪要)》에서는 의심하는 것을 비유해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고 했습니다. 콩하고 보리도 못 가리는 놈, 신랑과 종을 못 가리는 놈이란 뜻입니다. 의심하는 것은 쑥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입니다. 쑥맥도 모르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최상승선 공부를 하고 있고, 최고’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목에 깁스라도 한 것처럼 하고 다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나니 내 안에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내 안에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어서도 안 됩니다. 중국의 임허당은 불교를 허무적인 종교로 표현했지만, 절대 그게 아닙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면 하늘에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서 햇빛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혜광명(智慧光明)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을 깨달으면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서 좋은 것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아도 싫어하지 않는 양변을 초월한 자유자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성불’을 믿고 이해하면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못해도 정(正)과 사(邪)는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02호(2004년 2월 28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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