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대의 삶을 살아간다는 자체만으로 힘들고 지친 일이라 효를 항상 행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우란분절인 백중을 맞거나 또는 영가의 기일이 다가오면 이제야 못 다한 효를 다해야겠다며 음식 들고 고인 앞에 가서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효라고 할 수 없습니다. 효란 마음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어 시절을 불문하고 행해야 하는 것 입니다. 바로 마음에서 나오는 효를 해야 그것이 진정한 효라 할 수 있습니다.
효는 바로 여타 모든 형식적인 행위를 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마음 자체가 효인데 무엇 하러 날짜와 기일이라는 형식에 얽매여야 할까요. 하지만 저를 비롯한 모든 중생들은 미천하여 어떤 계기가 없으면 마음속 자리에 효를 채울 수도 없고, 마음속에 효가 없다는 것조차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방편책으로 필요한 것이 형식입니다. 그 형식이 계기가 되고, 채찍이 되어 마음의 효를 깨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천하다하여 방편책에 매달리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마음속에 있는 효를 찾으려 노력해야만 마음자리에 진정한 효를 담을 수 있습니다.
현세에 물질적인 효의 대가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부모를 위해, 조상들을 위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풍족한 물질을 제공했지만 그 가 죽어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를 이 세상에 나게 해 준 부모나 조상을 위해서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효란 무엇일까요. 효를 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일상의 자기라는 껍질 속에 있는 불성(佛性)인 자성(自性)을 찾아야 합니다. 자성이 바로 효입니다. 효란 바로 자성이지 따로 익히거나 배워야 할 것은 아닙니다. 자성을 깨닫는다면 효는 절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몸이 받기 전에 어디에 있었으며 어떻게 이 세상에 온줄 알고 계십니까? 이 몸뚱이는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이어주는 배에 불과합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진실한 참 나를 찾는 것입니다. 그 참 나를 찾는 수행이 바로 효입니다. 진정한 효란 바로 자기인 나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상주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조상, 부처님을 위해 꽃과 노래와 연등을 바치는 봉양의 효를 하는 것도 좋지만 각자가 대오각성(大悟覺性)하여 주변부터 밝게 정리하면서 내 마음, 내 가정부터 밝혀 나가, 끝으로 스스로 부처가 된다면 그만한 효는 다시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나인 자성, 즉 불성을 찾아 부처가 되는 것이 진정한 효라면 그 참 나인 불성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인간의 본래 진면목은 청정자성(淸淨自性) 입니다. 중생 모두가 부처가 될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쁜 일을 행하고 거짓말을 해서 마음에 때가 끼게 되어 그 성품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저 삼천대천세계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변하지 않듯이 인간의 마음 또한 변하지 않습니다. 배를 젓는 사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배를 젓는다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 또한 마음을 쓰는 주인공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피상적인 현상은 변하고 바뀌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을 일러 자성(自性)은 불변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에게는 불변한 자성은 어디로 갔을까요. 찾지 못하는 것 입니다. 왜 있는데 찾지 못할까요.
부처님은 성도(成道) 후 ‘일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덕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일체중생을 똑같이 평등하게 취급하신 혁신적인 일대 선언입니다. 여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성품에 지혜의 횃불을 밝히면 곧 본래면목(本來面目)그 자리요, 반야선이 다다른 피안·열반·저 언덕 자체인 것입니다. ‘마음과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므로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수한 망상과 집착,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 때문에 우리는 부처가 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나(我)라는 생각과 욕심을 남김 없이 버린다면 누구나 곧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러한 서원을 발할 때 정각(正覺)이 멀지 않습니다. 그 정각의 길은 바로 수행의 길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고 또 가고 화두를 씹고 씹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심여수(心如水) 입니다. 물은 얼음이 되고 수증기기 되어도 젖는 본성을 잃지 않듯이 마음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찾기 위한 최상의 방편이 참선 수행입니다. 자기 본래면목을 찾는 방법이 참선입니다.
끊임없이 화두를 들고 의심해 들어가다 보면 얻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얻으려고 하면 얻지 못하게 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깨달으려고 하면 장애가 생겨 팔만 사천 리로 멀어져갑니다. 모름지기 알음알이를 떨쳐버려야 합니다. 참선은 아는 것은 다 버리고 모르는 데로 들어가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 알려고 설치고, 안다고 설치고, 제가 옳다고 설치기만 합니다. 참으로 자기는 모르면서, 참으로 자기를 알 수 있는, 아는 데서 모르는 데로 들어가는 것을 하려들지 않는 사람이 바로 우리 중생들입니다. 참으로 모를 때 알아지는 것입니다. 참선은 백날 설명해도 모르는 것이지요. 실제로 하루에 한 시간씩이라도 해보면 차츰 알게 됩니다. 참선을 하다보면 마음자리를 알 수 있고, 번뇌 망상이 저절로 스러집니다.
만약 다망한 일상으로 참선 수행하기가 힘들고 어렵다면 살아가면서 복을 많이 지으십시오. 우리가 지은 복은 영원히 새지 않는 독에 물을 긷는 일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무주상보시의 공덕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준다는 생각도 말고, 받는다는 생각도 말며, 이 물건이 어떤 것인지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과거의 악업을 씻고 다음 생에 사람의 몸을 받거나 생사윤회의 고통을 끊는 지름길이며 바로 최상의 효의 실천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는 이 몸뚱이와 원수를 집니다. 이 몸뚱이가 성할 때 열심히 수행 정진하십시오. 하루가 억만 겁으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바로 ‘이 순간’이라는 찰나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끊임없는 수행만이 나를 찾고 참된 효를 다하는 것입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89호(2003년 8월 23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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