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집착함이 없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봉사’라는 단어를 불교적인 이름으로 바꾸면 ‘보시(布施)’ 입니다. 보시하는 마음이 없으면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보시는 자비로운 마음이 없으면 행하기 어렵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해를 끼쳤기 때문이고, 남이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쳤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마음으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끊임없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마음을 얻었을 때 용서받지 못할 악한 행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과 같은 포용력과 자비심을 얻었을 때 참다운 봉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진정한 봉사의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보시’는 대승불교에서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할 여섯 덕목인 육바라밀 중에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덕목입니다. 육바라밀 중에서 보시바라밀이 가장 먼저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수행의 가장 기본이 된다는 얘깁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에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라. 한 몸처럼 가엾이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보시는 대비심(大悲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봉사를 하는 것은 공덕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봉사를 하면 공덕이 쌓이고 이에 따라 복도 따라옵니다. 복을 지으려면 내가 힘들더라도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렵고 불우한 이웃들을 내 몸, 내 부모, 내 자식같이 생각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아무런 바람 없이, 또 그 어떤 상(相)에도 집착함이 없이 꾸준히 봉사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복을 짓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보시의 정신이며, 공덕인 것입니다.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은 이웃을 위해 베푸는 일에 대해 ‘주기 전에 마음이 즐겁고, 줄 때에는 마음이 맑아지며, 준 후에는 마음이 더욱 기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 짓는 마음은 다른 말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는 곧 대승불교에서 수행자들이 행해야 할 육바라밀 중 보시를 일컫는 말입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가장 먼저인 보시(布施)는 복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정신·육신·물질의 세 방면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보시’입니다.
보시에는 무주상 보시와 유주상 보시가 있습니다. 무주상 보시는 마음에 한 티끌의 거리낌이 없는 보시, 곧 집착함이 없이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강경》에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집착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까닭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짓지 않으면 받지 못하니까 꼭 복을 지어야 하고 복을 짓는 것이 바로 보시라는 말씀과 함께 보시할 때 상(相)을 남기지 말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보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 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떤 대가를 기대하는 보시가 아닌 부모의 자식사랑과 같이 무조건으로 베푸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유주상 보시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돕고, 베푼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현재 ‘복’이라는 대가를 바라는 유주상 보시를 행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주상 보시를 실천해야 합니다.
무주상 보시를 실천해야 하는 까닭은 보시하는 사람이 마음 한 구석에 조건이 담겨 있을 때 그 상대로부터 보시에 대한 대가가 되돌아오지 않으면 보시하기 전보다 더 큰 섭섭함과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 ‘복’을 짓자고 ‘보시’한 것이 오히려 죄업으로 변해 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보통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결국 섣부르게 보시해 놓고 복을 짓고도 죄를 짓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큰 보시나 작은 보시나 아무런 대가없이 무념으로 해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봉사의 공덕은 크게 보면 중생의 모습을 벗고 부처님이 되는 것이고, 작게 보면 자신의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세속적인 삶에 얽매여 육도 윤회하는 자기를 봉사를 통해 윤회의 사슬을 끊고 부처님과 같이 영원을 사는 자유인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봉사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봉사를 하면 복이 온다.’라는 말을 듣고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주상 보시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시작한다 할지라도 계속 하다보면 정말로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하는 것이 아닌 무념무상의 무주상 보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불교는 타종교에 비해 봉사자도 적고 복지기관도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국토를 이루기 위해선 복지기관을 많이 세우고 우리 불자들도 자비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우선 수행자인 우리 스님들부터 솔선수범해 정기적인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들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입니다.
《우다니경》에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경구가 있는데 이는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만 행복하게 잘 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내 이웃이 잘 살아야 하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이웃도 더불어 행복해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생명이며, 이웃은 곧 우리의 분신임을 알고 동체대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이를 잘 깨닫고 항상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로 만들 수 있고, 결국은 불국정토를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만불신문 61호(2002년 7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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