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봉우리에 외로운 달이 밝았는데 맑은 하늘에 비추어도 한 물건도 없구나. 천연에 값없는 보배가 오음(五陰)으로 뭉쳐진 이 육체 속에 파묻혀 있구나.”
우리의 육체 속에 알 수 없는 주인공이 묻혀 있어 그 한 물건이 온 법계를 두루 비추고 있지만 우리의 주인공을 알 수가 없다는 한산의 시입니다.
우리가 수행정진을 해서 무엇이 알아졌다거나 무엇이 나타난 것이 있다면 정진을 올바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정진을 하다가 “아! 이것이로구나!”하고 알아진 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의 공부는 빗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문양이 있고 색상이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겠지만 본래 문양이 없고 색상이 없는 것이라 그릴 수도,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의심을 가지고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 바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기가 약한 탓에 정진을 하면 할수록 어렵고 참지 못해 몸부림을 치게 되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동안 정법에 대한 인연이 있어서 우리는 어렵고 재미가 없는 수행정진의 길을 목숨 걸고 선택했습니다. 최상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선근의 씨앗이 없었다면 부처님 법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고 부처님 공부 또한 시작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깊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부처님 법을 믿고 오직 한 길을 향해서 정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다행한 일입니다. 또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부처님 법을 만나고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설령 공부를 하다가 힘이 들고 지쳐서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해도 우리는 이 길을 포기할 수가 없고, 병이 나서 끙끙 앓게 되더라도 생각만큼은 이 화두에 대한 한 생각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숨을 거두는 그 찰나에도 우리는 화두를 들면서 눈을 감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부처님 법을 믿고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나 나도 알 수가 없구나. 깊고 깊어 치밀하나 옹색함이 없다. 하늘과 땅이 앞과 뒤가 없고 동서남북의 방향에 머무르는 바도 없네.”
이 게송은 태고 보우 선사께서 당신이 주석하고 계셨던 태고암(太古庵)에서 읊었던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구절입니다. “내가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나 나도 알 수가 없구나.”라는 구절은 보우 대사께서 태고암에 머물고 계시지만 그곳에 왜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깊고 깊어 치밀하나 옹색함이 없다.”는 구절에서 옹색함이 없다는 것은 부족하고 부자유스러운 것이 없으며 비좁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표현한 암자는 태고암을 일컫는 말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사바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 그리고 이 육체가 자기의 작은 암자입니다. “왜 우리는 금생에 이 작은 육체의 암자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이 한 생각 자체를 우리는 암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깊고 깊어서 자기에게 왜 그 생각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 육체를 받았으나 그 육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육체는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고 죽게 되면 다시 사대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수·화·풍 그 자체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고 일 분 일 초를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머리 위에 있고 땅은 다리 밑에 있으나 어디를 가리켜 앞이라 하고 뒤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편의상 위도, 경도를 정해서 동서남북을 구별하고 있지만 동서남북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해서 화두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나침반 없는 조각배가 태평양 속에 던져져 있는 것과 같은 신세일 것입니다. 이 끝없는 우주 법계 속에 이 몸뚱이는 태어났지만 끊임없는 희로애락 속에서 물거품처럼 떠돌다가 언제 꺼져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히 불법을 만났고 또 정법을 만나서 우리의 갈 길이 있습니다. 또한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서, 정처 없는 신세로 일생을 살다가 육도를 또 윤회하는 처절하고도 외로운 영혼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찮은 중생들입니다만 부처님 법을 믿기 때문에 행복한 존재들인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녕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영원히 바르게 살려면 한 생각 속에 화두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것은 오직 이 한 생각을 단속하는 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한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도솔천으로도 가고 극락세계로도 가고 육도를 윤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한 생각 단속을 잘해서 정진을 하면 우리는 분명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노년에야 석가를 친견했다. 억만 겁을 윤회를 하다가 겨우 금생에야 불법을 만나게 되었다. 머리 위에 세월은 번갯불처럼 지나가고 있다. 밤새도록 울고 울어서 피눈물이 난다 하더라도 쓸 곳이 없구나.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지낸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 옛 선인의 말씀처럼 우리는 부처님 열반하신지 2500여 년이 지난 이 말법시대에 태어났고 무량겁을 윤회하다가 금생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처님 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번개처럼 흘러가서 엊그제가 젊었을 때인 것 같은데 벌써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잡혔습니다. 우리의 생사는 늙었다고 해서 금방 죽는 것이 아니고 젊다고 해서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한 생각을 단속한다면 그 무상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거기에 있으니, 정신을 가다듬고 일초 일초를 소중히 여기고 정진을 다짐합시다.
<2002년 2월 26일 용화선원 동안거 해제법문>
출처 ; 만불신문 53호(2002년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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