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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히 정진하는 것 보다 큰 공덕 없어”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보살의 삶은, 첫째 ‘상구보리(上求菩提)’ 입니다. ‘상구보리’란 부처님이 그랬듯이 ‘나도 성불해야겠다.’는 목표입니다. 둘째는 ‘하화중생(下化衆生)’ 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불국토를 건설해야 합니다.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열 가지 악업을 짓지 않고 자기 마음을 청정히 하는 데 있습니다.

이 몸은 열 가지 악업을 짓는 도구도 되지만 선업을 짓는 도구도 됩니다. 영리하고 현명한 사람은 이 몸을 열 가지 선업을 짓는 도구로 삼아 이 세상을 극락세계로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 몸을 열 가지 악업을 짓는 도구로 삼아 지옥을 만듭니다. 자기의 마음가짐에 따라 극락과 지옥이 생기기 때문에 극락과 지옥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열 가지 업은 십바라밀입니다. 십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방편, 원력, 정력(正力), 지(智)를 일컫는 말입니다. 십바라밀을 어렵게 생각하면 힘듭니다. 그저 쉽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면 됩니다.

우선 정직입니다. 항상 마음을 바르게 쓰면 바로 그 순간이 부처님 도량이 됩니다. 다음은 ‘나도 부처님과 같이 성불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도량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도 부처님과 같이 성불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나도 남과 같이 무엇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갖게 됩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겠다고 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복을 지어야만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나도 부처님과 같이 성불해야겠다.’고 먼저 마음먹어야 그 자체가 부처님 도량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육바라밀,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실천하게 되면 그것이 곧 부처님 도량이요, 항상 부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보시를 해야 합니다. 보시를 한다는 것은 작복을 의미합니다. 즉, 복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복을 짓는 이유는 모든 허물을 틀어막는 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보시를 하는 것은 복 받는 일이고, 보시하면 죄를 안 짓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입니다.

“염불은 업장을 맑히고 참회는 지난 잘못을 토해내”

또 다른 한 가지 보시는 갚는 것입니다. 죄짓는 것은 빚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을 짓기 위해서는 빚을 갚아야 합니다. 남을 구제하는 것도 보시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방법에는 보시 말고도 염불과 참회가 있습니다. 염불은 자기 업장을 맑히는 것이고, 참회는 지난날 잘못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어리석은 중생은 열 가지 악업을 다 짓기 때문에 구족중생이라 그럽니다. 구족중생에게는 지옥만 있고 극락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법당을 짓고 부처님을 모셔야 한다고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사바세계에 법당을 짓고 부처님을 모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이 항상 중생들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오직 중생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부처님이 중생 곁에 있다면 중생은 극락세계에 있겠습니까? 사바세계에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오직 중생을 위해 왔다면, 필연적으로 사바세계에 와 계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다 제도하기 전에는 극락세계에 돌아가실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계시는데 바깥에 계시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집을 지어야겠죠. 그래서 절을 처음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법당에는 왜 부처님을 모시겠습니까. 그것은 내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기 위함입니다. 부처님이 중생 곁에 와 있는 것은 대비방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정법을 닦으라고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왜 어리석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법을 닦는 데는 부지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어서 닦아야 하는 줄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야무지고 현명한 사람은 세상일에도 부지런하고 염불하고 기도하는 데도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낮에는 일해야 하니까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염불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야무진 사람입니다.

또 ‘중생들은 게으르다’고도 합니다. 복을 짓는데 등한한 사람을 두고 불교에서는 ‘게으르다’고 합니다. ‘중생이 게으르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아서 게으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짓지 않는 것을 보고 ‘게으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짓는데 게으른 이, 악업 짓는데 부지런한 이가 불쌍한 사람”

중생은 멍청하기도 합니다. 사적인 법을 닦는 데는 영리하지만 정법을 닦는 것에는 영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불교에서는 ‘불쌍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불쌍하다’는 말을 제대로 못 먹고, 제대로 못입고, 생활이 고단한 사람들에게 쓰지만 불교에서는 정법 닦는 데는 어리석으면서도 사적인 법을 닦는 것에는 영리한 사람, 복 짓는 것에는 게으르면서도 악업 짓는 데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두고 ‘불쌍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내가 게으른가, 아니면 부지런한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지런해지기 위해서는 육바라밀 중 정진 바라밀의 공덕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유교경》에서 “이 세상에서 열심히 정진하는 공덕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정진의 반대 개념은 게으름인데 부처님은 “게으름은 모든 행의 폐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실천에 옮기지 못하니까 성취나 성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살면서 게으르면 의식주가 부족하고 출가해서 게으르면 생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첫째도 부지런해야 하고 둘째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또 절에 가면 절 한 번이라도 더하고 염불 한번이라도 더 해야 합니다. 일체 모든 일들은 정진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삼매도, 지혜도, 공덕도, 나가서는 자기의 모양도, 더 나아가 이 세상도, 세상에 사는 중생들도 모두가 열심히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10대 제자 중에 아나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데, 출가해서도 공부는 안하고 놀거나 자기만 했습니다. 하루는 부처님이 “아나율아, 너는 성인을 만나고도 잠이나 자고 있으니 축생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꾸짖습니다. 아나율은 부처님의 꾸중을 듣고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실명하게 됐지만 부처님 말씀대로 공부하다가 천안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열심히 정진해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빈곤하고 잘살고, 천하고 귀하고, 못생겼고 잘 생겼고 간에 사양하지 않고 빠짐없이 해야 할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육바라밀입니다. 보시하는 일에 빠지지 말고 인욕하는 일에 원한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정법을 쓰는 일,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일, 무상정각을 더하는 일은 빠지지 말고 사양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출처 ; 만불신문 49호(2002년 1월 1일자)

2010-06-10 / 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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