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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상보시로 최선의 공덕 쌓아야”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보시를 하면 공덕의 복전(福田)을 일굴 수 있습니다.”

거리에서 설법하시는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니다이라는 여인은 ‘나도 보시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니다이라는 여인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있었던 여인입니다. 니다이 여인은 얼마나 가난했던지 부부가 함께 사는데 옷이 한 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옷을 입고 나가면 부인이 벗은 채로 집안에 있었고 부인이 옷을 입고 나가면 남편이 벗은 채로 집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니다이가 거리에 나섰다가 거리에서 설법하는 스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니다이가 환희심이 난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맨몸으로 기다리는 남편한테 “여보, 우리도 보시를 하고 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내 당신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베풀게 없지 않소?” 하고 말하니 “왜 베풀게 없어요? 이 누더기가 있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남편은 기절할 뻔했습니다. 단 한 벌밖에 없어서 교대로 입고 나가는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주면 우리는 뭘 입고 살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니다이는 “여보, 나는 그래도 오늘 보시함으로써 착한 일을 하고 희망 있는 내일을 기다리고 싶어요. 오늘 착한 일을 하지 않고 희망 없는 내일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아요.” 하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그 누더기 한 벌을 보시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비록 남이 볼 때는 누더기였지만 그 부부에게는 전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거리에 나가 스님에게 “스님, 이 옷을 보시하겠습니다.” 하니 스님은 영문도 모르고 “그 옷을 벗어 주십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서 축원을 하리다.” 했습니다. 니다이가 부끄러운 얼굴로 “스님 이 옷을 보시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 집에 가야 하는데 따라가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스님을 모시고 가서 문밖에 스님을 기다리게 하고 방안에서 옷을 벗어서 문틈으로 옷을 내어 주었습니다. 스님은 그 옷을 받아서 절로 가지고 갔습니다.

절에서는 여기저기서 불자들에게서 받은 시주물들이 모여졌는데, 사람들이 보니 그 옷은 다 떨어지고 냄새나는 누더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아이고, 이것도 공양이라고 할 수 있나?”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그 옆을 지나던 부처님이 그것을 보시고 “오늘 우리 교단이 받은 보시 중에 가장 청정하고 귀한 보시는 니다이가 공양한 보시이다. 이 여인은 이 옷을 공양한 공덕으로 오는 세상마다 천상에 태어날 것이며 필경 부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빈비사라왕은 화가 났습니다. 자기는 교단에 수없이 많은 보시를 했는데 부처님께서 자기에게는 수기하지 않고 다 떨어진 옷을 보시한 니다이에게만 수기하신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뵙고 “왜 저에게는 수기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부처님이 왕에게 “왕이시어, 육안으로 볼 때는 하찮은 떨어진 옷 한 벌이지만 그 마음속에는 그 여인 필생의 모든 원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수기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왕은 부끄러워 물러났고 많은 새 옷을 니다이에게 보시했습니다.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모든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것은 만족함에 눈을 뜨는 것과 같습니다. 만족함을 아는 것은 부귀와 행복의 편안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고 만족을 모르는 것은 어디 머물러도 불행한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게송 가운데 보리심을 내밀면 곳곳마다 극락 아닌 곳이 없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우리는 극락을 좋은 환경과 멋진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이 주어져도 만족할 줄 모르면 실제로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임제록》에 보면 임제 의현 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했습니다. 머무는 곳에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좋은 환경

만 쫓아다니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머무는 곳에 마음을 맞추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 중에 지옥을 가는 사람은 보살과 악업을 지은 중생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에게는 지옥도 고통이 아닙니다. 원해서 가기 때문입니다. 원해서 일하는 자는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억지로 일하는 자는 고통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눈에 속지 말라. 귀에 속지 말라. 입에 속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좋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 맛보고 다시 얻어지지 않으면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살다가 좋은 것을 보면 금방 즐거워집니다.

인도 사람들은 일생을 4단계로 나누어서 얘기합니다. 처음 25년 동안은 열심히 배우고 기술을 익히는 시기, 다음 25년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서 부지런히 노력하는 시기, 다음 25년은 숲 속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시기, 그 다음 25년은 널리 천하를 다니면서 법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수행을 하고 수행한 후에 널리 보시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멋있는 일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땅 위에 누웠을지라도 행복할 수 있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천당에 있을지라도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은 상황과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을 조건과 상황논리로 보기 때문에 물질을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행복할 줄로 압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조건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금, 은, 보화 속에 있어도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많이 마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소금물을 마시면 금방은 갈증이 해소되지만 결국에는 더 목이 마른 것처럼 욕심도 많이 낼수록 더 커집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이익을 바라고 행복을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좋은 환경이나 조건 속에 있어도 행복하지 않으며 만족을 아는 사람은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보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 출처 ; 만불신문 46호(2001년 11월 15일자)

2010-04-12 / 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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