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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논리가 아닌 실천행”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부처님께서는 오심이 없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여래(如來)’라고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오신 것 같지 않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 내용을 설명해줍니다. 여기엔 인연법, 불교에서의 삶과 죽음의 문제 등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해는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 세상에 와서 모든 것들을 비추어 곡식이 자라고 온갖 나무가 자라나게 합니다. 이 같은 이치로 부처님께서는 제자리를 떠나시지 않으시고 오셨습니다.

연못에 비춰지는 달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 만물이 전부 소리 없이 오고 가는데 중생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옴이 없이 오고, 감이 없이 갑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해탈법’이라고 하고 ‘묘법(妙法)’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은 이 사실을 몰라서 삶에 집착하고 죽음에 공포를 느낍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제약하고 속박합니다. 그래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에 계시면서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만물 이치와 같습니다.

파도는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일어납니다. 풀잎의 이슬은 맺힘이 없이 맺히고 사라짐 없이 사라집니다. 구름도 옴이 없이 오고 감이 없이 갑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중생은 삶의 집착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죄업을 만드는 것입니다.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만 만들고 나서는 그 안에 갇혀서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누에가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 집을 짓고 나서 그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중생업(衆生業)’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가정의 은혜와 애정입니다. 은혜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고 애정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정입니다. 이것을 ‘은애(恩愛)’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의 경쟁입니다. 가정에서는 약한 사람을 보살피지만 사회에서는 약하면 죽습니다. 이처럼 가정과 사회는 많이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밖에 나와서 밭갈이를 하는데 힘 없는 벌레를 독수리가 잡아먹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약한 벌레를 도와주지는 않고 오히려 잡아먹는 것을 가정에서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작은 사건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여러 곳을 다녀보니 사회의 경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노병사(老病死)’였습니다. 사회의 경쟁도 늙음, 병듦,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경쟁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더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가정의 애정이 사회의 경쟁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또 사회의 경쟁이 죽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죽음을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서의 승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왕궁과 세상을 다 버리시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도를 닦으셨습니다. 깨달음, 지혜를 통해서 그것을 해결하셨습니다. 지혜를 통해서 죽음을 살펴보니 죽음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불멸(不滅)이었습니다. 오는 것이 옴이 없이 오듯이 가는 것도 감이 없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이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매일 거리에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설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비유와 방편 등을 통해서 알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으신 후에 여러 날을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200리를 걸어서 녹야원으로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다섯 사람 밖에 만날 수 없었습니다. 심오한 법은 대중적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없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없애주고 삶의 집착을 해소시켜주어서 모든 죄악과 원망을 벗어나게 해줍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해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중생교화(衆生敎化)’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삶의 애착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뭔가를 남기기 위해 애를 씁니다. 모든 집착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바로 직전까지 설법을 하셨습니다. “항상 정진하라. 정진만이 해탈하고 지혜를 얻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은 없다’란 진리를 깨닫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유 있고 넉넉하게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렇게 ‘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의 의미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며 슬픈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못 속의 달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대성통곡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이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진리를 알고부터는 살아가는 방법이 중요합니다.

안으로 복을 짓고 밖으로도 복을 지어야 합니다. 안으로 복을 짓는 것은 ‘내복(內福)’입니다. 늘 죽음이 없다는 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항상 지혜심을 냅니다. 밖으로 복을 짓는 것은 ‘외복(外福)’이라고 합니다. 외복은 사람을 위해 따뜻하게 위로한다는 것으로, 사람과 물질을 통해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내복과 외복을 같이 지닌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지혜와 복덕을 함께 닦는 것입니다.

죽음은 현 생명으로 보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본 생명으로 보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말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러 생각한다거나 기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 속의 개념이나 논리는 현실이 아닙니다. 책으로만 기억한다면 현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드시 실행으로 옮겨야 합니다. 불교는 논리가 아니고 깨달음입니다. ‘신해행(信解行)’을 해야 합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지금 불교의 위기란 이해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학은 알고 행하는 학문입니다. ‘죽음이 없다.’는 진리를 확실히 알 때까지 노력해야 하고 그 깨달음을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견성성불’이고 ‘중생제도’입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제40호(2001년 8월 1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2010-03-16 / 4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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