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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 부적 두 가지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 동지, 음력설, 대보름 등은 우리 민족 문화에 뗄 수 없는 세시풍속 행사입니다. 이런 세시풍속을 불교가 끌어들여 의미를 새롭게 부여했습니다. 때에 맞추어 기도 정진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법회와 연결시켜 입춘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미풍양속을 소홀히 하지 않고 여기에 맞는 법회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런 전통법회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정법(正法)을 드러내지 못하고 삿된 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입춘의 불교적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재팔난을 막는 입춘대길 부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이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입춘' 하면 잘 알려진 것이 입춘부(立春符)죠.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 써서 대문에 붙이는 입춘부입니다. 아직 날씨는 춥지만, 얼음 속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뱀이 꿈틀하며 깨어나고, 땅밑에 새로운 생명이 움트며 새로운 기운이 도래하는 계절입니다. 이 절기엔 새로운 기운을 받아 길한 삶을 기원하는 새해의 의미도 있습니다.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는 문구도 써붙이지요. ‘건양’은 고종 때의 우리나라 연호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많은 백성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자는 뜻에서 쓰인 연호입니다.

  우리도 이 법회 끝나면 입춘 부적을 나누어 가질 것입니다. 몇 년 전, 굴지의 강남 사찰에서 입춘부를 돈 받고 판매한다 하여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정법을 세우려면 정견(正見)부터 세워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요행수를 조작하여 상업성의 시류화로 이끌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의 본질을 벗어나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입춘 부적의 의미를 바로 알고 써야겠습니다. “상도선원에서도 부적을 주느냐”는 질문을 종무실에서 전화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종무실에, 부적의 진정한 의미를 불자들에게 알려드리고 부적을 하자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나누어 드리는 입춘부 종이는 가져가시되, 지금 하는 이 법문을 잘 듣는 것이 진짜 부적을 갖고 가는 것입니다.

  합장하시고, 경전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느낌을 겪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 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

  비구들이여, 그러니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 느낌만을 경험할 뿐이며 결코 정신적인 느낌은

겪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에 연이은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의 화살로 인한 괴로움만을 겪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괴로운 느낌에 접하더라도 결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인 느낌만을 경험할 뿐이다. (...)

  그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일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고 하나니, 그는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에 매여 있지 않으며

그는 괴로움에 매여 있지 않다고 나는 말한다.


 지금 읽은 것은 상윳따 니까야 <화살경>의 일부입니다. 어떻게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관해 고구정녕하게 들려주신 부처님 말씀입니다.

  삼재(三災)가 뭐지요? 풍재, 화재, 수재, 이 세 가지를 대삼재라 하죠. 소삼재는 전쟁, 질병, 굶주림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지금은 잘 먹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요. 먹을 것이 많지 않고 보릿고개도 있고, 역병도 많고... 연배가 좀 있는 분들은 다 경험하고 기억하시죠. 물론 지금도 신종 플루 등의 질병이 창궐합니다만.. 이런 재앙들은 왜 생길까요? 어떤 목사님 말대로 악마의 저주인가요? 이번에 지진으로 인한 아이티 재난을 두고 이런 말을 했던 목사님이 미국에서도 비판을 받았지요.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우주는 중생의 업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인연이 다하면 파괴되고 공(空)으로 돌아갑니다. 생성-존재-파괴-소멸 즉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겪으며 우주가 변천한다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생성될 때보다 존속, 파괴될 때 삼재의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자연법칙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지만, 파괴의 주범은 인간입니다. 왜 파괴가 시작될까요? 연구해보니, 근본적으로 종교 사상에서 기인한 게 크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 사상이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기독신학자들은 이를 반박하며 ‘성서를 잘못 해석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자연계의 모든 생명을 지배하라는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성경 속의 하느님이고 보면, 기독교 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연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에도 이와 비슷한 인간 중심의 사유 방식이 있었습니다. 이 두 큰 줄기가 근현대 과학 문명을 낳았고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해가며 새로운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화석 에너지 남용 결과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아져서 남북극의 빙하가 녹고 해수 온도가 상승합니다. 그리하여 대기권 구름의 생성이 불규칙하게 되어, 금년처럼 아주 추운 겨울이 오거나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하는 비정상적 기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근본 원인은 지구온난화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에너지면에서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불교진흥원 신년대법회에서도 제가 ‘e-green 붓다‘라는 주제 하에 법문을 하였습니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스스로 환경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사상으로 살아야 삼재로부터 벗어나지, 부적을 걸어놓는다 하여 극복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삶을 어떻게 생태적으로 살아갈까요? 입춘과 관련해 이야기하자면, 이 무렵이면 불자님들이 부적을 절에서 꼭 해줬으면 하고 바라시고, 또 꼭 받아서 가져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적을 집에 갖고 가는 것은 좋지만, 신념을 갖고 열심히 믿고 행하면 효과가 나지만 믿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부(符)’라는 것은 상서로움, 믿음을 말합니다. 어떤 부호나 글자나 그림에 우주적 파동 에너지가 입력되는데, 그것을 지니는 순간 그 에너지가 몸 어느 부분에 내재되어 있다가 그 힘으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편이 바람 피우면 그걸 잠재우기 위해, 또 돈을 좀 많이 벌거나 따게 해달라고, 시험 보러 갈 때... 등 힘든 상황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예로부터 주술적인 것을 가미해서 이렇게 지니고 기대왔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에너지에 의존하는 것이 완전히 비과학이거나 미신인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의미가 있고 효과가 있습니다. 단, 부적을 쓴다면 진짜로 힘을 발휘할 능력 있는 분이 부적을 써야 합니다. 아무나 점술가 같은 사람이 함부로 써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적에 돈을 많이 들인다고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한다면 요행수에 빠지고 정법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법을 선양하는 스님들은 부적을 잘 써주지 않습니다.

  옛날엔 법력 높은 큰스님들이 경명주사를 참기름에 개어서 한지에 정성껏 입춘 부적을 써주셨으나, 언제부턴가 조계사 앞에 가면 공장에서 인쇄된 부적을 대량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왜 혹세무민의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것을 남용, 오용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부적을 써갖고 가서 부적만 믿고 지지리 공부는 안 한다고 해보세요. 이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입적하신 석주 큰스님께서 ‘오유지족’이라는 부적을 써주신 겁니다. ‘오유지족(吾唯知足)’이란 무슨 뜻이죠? ‘나 오’ ‘오직 유’ ‘알 지’ ‘족할 족‘ - ’나 스스로 오직 만족함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네 글자 모두 입 구(口) 자가 들어가죠. 그래서 중간에 입 구 자를 넣어 오, 유, 지, 족 네 글자가 좌우상하에 배치되게 써주신 것입니다.

 

석주 큰스님의 글씨 '오유지족'

  ‘오유지족’ 아시겠죠. 이것이 제가 오늘 드리는 첫 번째 부적입니다. 진짜 부자되는 부적이죠. 만족함을 알 때 그것이 부자 아닙니까.


조선시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높은 벼슬을 했던 김정국(金正國)이라는 선비가 1519년 낙향하여 살면서 스스로 ‘팔여(八餘) 거사’라 칭했습니다. 왜 ‘팔여’냐 하면, 여덟 가지가 넉넉한, 즉 만족한 삶을 누렸기 때문이죠. 그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토란국에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온돌방 따뜻한 바닥에 넉넉히 잠잔다.
  맑은 샘물을 넉넉히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히 읽고,
  가을 달빛을 넉넉히 받는다.
  새소리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듣고,
  서리 맞은 국화향, 눈속의 매화향을 넉넉히 맡으며,
  위 일곱 가지 풍요로움을 넉넉히 즐기며 산다‘

 이것이 팔여 거사의 여덟 가지 여유였습니다.

 반면 김정국 선비의 친구가 말하기를, 좋은 집에 살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진수성찬을 먹어도 부족해하고
  호화로운 침구에 잠을 자면서도 불편해하고
  이름난 술을 마시면서도 부족해하고
  좋은 그림 좋은 책을 감상하면서도 좋은 줄 모르고
  절세미인 기생들과 노닐면서도 더 미인을 찾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좋은 줄 모르고
  향기로운 향수를 쓰면서도 더 좋은 향수를 찾는다.
  위 일곱 가지 부족함 자체를 또 부족해한다.’

  이것이 ‘팔여 거사’와 대비되는 ‘팔부족 거사’입니다.

  그러면 돈도 벌지 말라는 얘기냐고요? 아닙니다. 노력해서 많이 벌되 모든 사람을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가치 있게 쓸 생각을 하며 돈을 벌라는 것이지요.

  어느 거사님이 불우 학생의 공부를 돕는 데에 써달라며 소정의 금액을 장학금으로 선원에 보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기업인은 기업 활동 중 발생하는 이익금을 뜻한 좋은 일에 쓰겠다고 원을 세우고 있습니다. 승려 복지, 승려 교육 활성화, 법회 활성화에 써달라고 기탁을 하신 이 분은 정말 반듯한 불자입니다. 비단 상도선원에 기탁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게 바로 앞에 말한 오유지족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잘 쓰는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모든 분이 행복하게 사는 데에 돈을 쓰는 것이 진짜 부자의 삶입니다.

  제가 드리는 두 번째 부적은 행복해지는 부적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화살은 어쩔 수 없이 맞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화살은 그 화살로 인해 정신적 괴로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2010년 경인년은 원숭이띠, 쥐띠, 용띠가 들삼재인 해라고 하지요. 그래도 제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부적으로 삼재를 너끈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유지족. 또 하나는 두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

  첫 번째 화살을 맞는다 해도 그대로 수용하면 됩니다. 싫어하여 거부하고, 좋아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려면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정한 불교 수행은 전적인 수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분별심이 발동하여 두 번째 화살을 맞게 되거나 맞을 만한 환경과 조건을 만들게 됩니다. 이 조건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보고, 그 세력이 멈출 수 있도록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일어나려 할 때 알아차리면 분노가 약해집니다. 간화선 수행을 하고도 수행 후 점검해보니 화가 더 많이 난다고도 합니다. 그럼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무의식에 잠재한 오염원들을 흔들어놓아 그게 녹으니 아직도 구석구석 남은 분심의 번뇌들이 조건을 만나면 나오는 것입니다. 의식이 깊어지고 선명하게 보이는 겁니다. 생각들을 명료하게 볼 수 있는 힘 즉 사띠가 극대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화났을 때 볼 수 있는 힘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화살을 쏘지 않고 고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내용이 경전 중 디가 니까야에 있는 ‘정신경(淨信經)’에 나옵니다. 삶의 방해 요소가 제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지도하는 것이 부처님의 최상의 교육방법입니다. 방해 요소를 직접 자꾸 건드리니 더 싸움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화살은 무엇입니까? ‘수행했는데 왜 이러냐?’라고 스스로 트집을 잡는 마음입니다. 수행 후의 차이점은 부부싸움을 자주 하더라도, 냉전이 지속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입니다. 빨리 마음이 흘러가게, 좋고 싫은 감정이 오래 머물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되는 사람, 행위를 하고 나서 남는 것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 에너지가 꽉 차 있는 사람입니다. 마왕 파순이에게 틈을 주니까 삼재팔난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드린 두 가지 부적 잊지 마시고, 스스로 행복해지려면 주위와 행복을 나누셔야 합니다.

   그럼 두 번째 화살에 대해 말씀하신 '화살 경'의 끝부분을 읽으면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간의 차이점이고, 특별한 점이고, 다른 점이다.


  지혜 있는 이, 많이 배운 이,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이나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 겪지 않나니,
  현자와 범부 간에 능숙함의 차이가 이렇듯 크도다.

  법을 터득한 이, 많이 들은 이,
  이 세상과 피안의 세계를 올바로 보는 이,
  기꺼운 법에 그 마음 설레지 않고
  원하지 않은 것에 적의 가지지 않도다.

  순(順) 역(逆)이 모두 흩어지고 꺼져서
  이미 존재하지 않나니
  때 없고 근심 없는 길을 알아 올바로 꿰뚫어 아는 자
  존재의 피안에 도달했다고 이르나니.

 

* 이 법문은 '상도선원 카페'에서 가져왔습니다. [원문 보기]

2010-02-08 / 6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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