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무렵 원오 극근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구순안거(九旬安居)란 무엇입니까?”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법(法)과 다르지 않았노라.”
결제란 90일 동안 공부인들이 만들어낸 영산회상(靈山會上)입니다. 납자들의 일상 속에서 드러낸 모든 언행은 그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본분사를 드러내는 작용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의 십이시(十二時) 가운데 언제나 활발발한 기봉(機鋒)을 아끼지 않고 드날렸습니다. 성벽을 쌓을 때 큰 돌이건 작은 돌이건 올리기만 하면 빈틈없이 들어맞는 것처럼 불조의 혈맥이 말마다 관통하고 행동의 움직임마다 법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승천 사확(承天 辭確)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도(道) 입니까?” “모든 언행이 도를 드러내는 것이니라.”
집이 가난하면 거친 음식도 가릴 여지가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일이 다급해지면 글씨를 휘갈겨 쓸 여유마저 없습니다. 그저 분별심 없이 손 가는대로 집어 드는 그대로 하나하나가 모두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망령되게 분별심을 일으켜 혹여 식정(識情)을 증장시키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어찌 다시 결제니 해제니 하면서 허물을 만들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알고 보면 까치가 외로운 노송나무에서 울고 있는 것도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정물(有情物)의 설법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이는 무정물(無情物)의 설법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법입니다. 도(道)도 끊어지고 사람도 끊어진다면 까치는 까치대로 노송은 노송대로 자기할 일을 할지라도, 어리석은 이들은 무정물이 자기 할일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 조차도 알아차릴 수 없는 법입니다.
결제공부가 모자랐던 이는 해제를 결제삼아 더욱 향상일로(向上一路)해야 할 것입니다.
살우수견혈지의야(殺우須見血之義也)요 차상위인수위철저(此上爲人須爲澈底)니라 소를 잡으려면 모름지기 피를 보아야 하듯이 여기에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철저해야 하느니라.
2556(2012)년 동안거 해제일 도림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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