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을 수 있을까?’ 번민하는 구도자들의 필독서!
2010년 가을, 수행자에게 주는 희망의 법음 견성 체험 통해 들려주는 구도기와 생생한 설법
이 책이 기존의 고승 법어집과 다른 점은 화두 참선을 공부한 선사의 생생한 구도기와 견성체험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심어주는 설법이 알기 쉽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근현대 호남의 대표 선사였던 해안(海眼, 1901~1974) 스님은 경봉 스님과 함께 ‘동(東) 경봉, 서(西) 해안’으로 불리며 선풍을 떨쳤던 선승이다. 해안 스님은 당신의 참선공부 경험담을 들려주며 “화두일념에 들면 누구나 7일만에 깨달을 수 있다”고 수행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 30~40년을 선방에서 공부해도 아무런 진보가 없어 간화선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나도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해안 스님은 ‘제1부 깨달음의 혁명’에서 “발심은 부처의 어머니요 공덕의 탑”이라며, 목숨을 내건 간절한 구도심만 있다면 누구나 깨달음의 혁명을 맞이할 것이란 자신감을 심어준다.
해안 스님은 이 책에서 당신이 직접 겪은 선방의 구도과정과 견성 체험을 곁들여 선객들에게 법문하고 있으며, 당신이 깨달은 경계를 산문과 선시로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제2부 ‘눈앞의 밝은 달’, 제3부 ‘어느 것이 님의 얼굴 아니리’(선시)는 깨달은 분상에서 출ㆍ재가 제자들에게 설법하고, 당신의 심경을 노래한 글들이다.
간화선의 돈오 수행법, 체험적으로 제시
일반적으로 정진을 오래 해야만 깨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수행자가 많다. 그러나 돈오(頓悟: 단박 깨침)를 통해 증득하게 되는 견성(見性)은 단시일을 두고 결정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해안 선사의 견해이다.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이 이미 분명히 말했지만, 아무리 미련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7일이면 도를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그것을 긍정하고 확언합니다. 만일 7일간에 깨치지 못했다면, 공부하는 사람의 정신자세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기간이 짧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안 선사는 화두를 타파할 때까지는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으로 알고 죽기 살기고 대들어 화두삼매에 들어야지, 엉성하게 해가지고는 공연히 비싼 양식만 축내 빚만 무거워질 뿐이라고 당부한다.
“미국의 대 발명가인 에디슨은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책상 위에 있는 계란을 삶는다는 것이 무심결에 자기의 회중시계를 물에 담갔답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직 화두 일념에 사로잡혀 옆에서 뇌성벽력이 쳐도 듣지 못해야 합니다. 찬바람이 뼛속에 스며들어도 추운 것을 관계치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그러지 못합니다.”
따라서 견성을 목표로 공부하는 수행자는 생명에 대한 애착마저도 놓아야만 관문을 통과할 수 있으며, 그런 간절한 발심만 이어진다면 7일이란 기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이 해안 선사의 체험담이다.
“이 일을 성취하려면 한 번 죽어야 합니다. 눈도 죽고 귀도 죽고 입도 죽어야 합니다. 죽을 각오로 대들어야 영원히 살 길이 열리지 어설피 살려고 버둥대면 오히려 죽는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결심으로만 한다면 7일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라 생사일대사를 결정 지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해안 선사는 이 책에서 용맹정진 6일만에 ‘은산철벽(銀山鐵壁)’화두를 타파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참선정진의 요지와 화두 참구시 주의할 점, 종소리로 깨닫기, 일상 속에서 수행하는 법에 대해 자상하게 법문하고 있다.
당대의 선지식들도 찬탄한 대선사의 면목
“이것은 시방의 제불과 역대 조사 등 천성만성(千聖萬聖: 무수한 성인들)도 깨달을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전할 수 없어서 도무지 손끝도 댈 수가 없으며, 아무리 찾아보아도 자취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고양이도 잘 알고, 개도 잘 말하고, 새도 잘 노래 부르고, 나비도 잘 춤추는 것이다. 하물며 일생 동안 대중을 위해서 몸을 잊고 교화하신 해안 선사의 어록이 나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서옹 대종사(1912~2003, 조계종 제5대 종정)
“해안 선사는 일찍이 백양사 조실이었던 학명 선사 문하에서 약관의 나이로 부처님의 심인(心印: 진리의 핵심)을 요득하고 후일 중국으로 건너가 널리 제방의 선지식과 거량하고 변산으로 돌아와 서래선림(西來禪林: 내소사 선원)에 당(幢: 깃발)을 세우고 수연중생(隨緣衆生: 중생의 인연을 따라)하여 후학의 지도에 일관하였다.” - 석주 대종사(1909~2004, 조계종 제8대 총무원장)
“큰스님의 생활 그것이야말로 바로 걸림 없는 낙도(樂道: 도를 즐기는) 생활이었으며, 오직 한없는 자비로써 대중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는 도인의 진면목이 역연하였다. 해안 대선사께서는 선지(禪旨)가 투철하시고 천지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셨기에 범상한 생활로써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요, 사사시불법(事事是佛法: 일마다 진리)임을 몸소 실천해 보이실 뿐, 부생(浮生: 뜬구름 같은 인생)의 명리 같은 것에는 일호의 착(着)도 두지 않으셨다.” - 서돈각 박사(1920~2004, 학술원 회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해안(海眼) 선사 행장(行狀)
스님은 1901년 음력 3월 7일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아버지 김해 김씨 치권공(致權公)과 어머니 은율 송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름을 성봉(成鳳)이라 했으며, 커서는 봉수(鳳秀)라 불렸고, 당호는 해안(海眼)이다. 10세를 전후하여 가까운 마을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언행이 방정하고 두뇌가 총명했다.
14세 되던 해 변산 내소사에서 덕이 높은 한학자가 《맹자(孟子)》 천 독(讀)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필상(筆商: 붓 파는 상인)을 따라 한학자 고찬(高讚) 선생을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내소사 중흥주였던 만허(滿虛) 선사에게 출가하고 불연을 맺게 되었다.
스님은 17세가 되자, 호남의 대본찰인 장성 백양사에서 두발을 깍고 송만암 대종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으며, 그해 백양사 지방학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무오년, 스님의 나이 18세가 되는 해 12월, 납월 팔일 성도절(成道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음력 12월 8일)을 앞두고 선원에서는 연례행사로 7일간 용맹정진을 하게 되었다. 스님은 학명 조실스님으로부터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고 생사의 간두(竿頭: 장대 꼭대기)에 서서 화두(話頭) 일념에 자타(自他: 나와 남, 주관과 객관)를 몰록 잊었다.
그리하여 정진 7일째 되던 날 저녁,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이어 종소리가 울리고 선실의 방선죽비가 탁! 탁! 탁! 하고 터지는 순간, 스님께서는 심기가 일전하여 전에 없던 환희의 세계를 맛보는 동시에 답답하던 가슴이 일시에 시원함을 느꼈다. 마침내 새로운 인생으로 탄생하신 것이다.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에[鐸鳴鐘落又竹?] 봉새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네[鳳飛銀山鐵壁外] 누군가 나에게 기쁜 소식 묻는다면[若人問我喜消息] 회승당 안에 만발 공양이라 하리라[會僧堂裡滿鉢供].
이것은 그때 당시 스님의 경계를 읊은 송(頌: 깨달음을 묘사한 선시)이다. 여기서 봉(鳳)이라 함은 스님 자신[鳳秀]을 뜻하는 것이다. 이때의 7일간 용맹정진이야말로 생명을 걸어 높고 벌인 한판 싸움이었으며, 스님은 마침내 승리자가 된 것이다.
후일 스님께서는 가끔 그때 일을 회상하셨다. 특히 새벽에 조실스님을 뵙고 공부의 진도를 점검받는데, 나흘째 되던 날 호되게 꾸중을 받고 쫓겨난 뒤 조실스님이 다시 “봉수야!” 하고 불러서 영문도 모르고 얼른 문을 열려 한 즉, 문은 꼭 잠겨 있어서 피가 끓는 분한 마음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대목에 이르면, 어느새 스님의 음성은 촉촉이 가라앉고 눈시울이 붉어지던 것을 우리는 엿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법문을 듣던 우리의 마음도 숙연해지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스님은 1920년, 백양사 지방학림을 마치고 바로 서울로 돌아가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하여 2년간의 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해 7월에 백양사에서 대선법계를 품수하였다. 이제 스님께서는 내외전(內外典: 불교 경전과 일반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고 이미 심전개오(心田開悟: 마음자리에 대해 깨달음)한 바도 있었으나, 정진의 고삐를 늦추려 하지 않고 더욱 갈고 닦기 위하여, 1922년 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을 지나 중국으로 구도의 고행을 떠났다. 그리하여 광활한 중국 천지에 널리 선지식을 참문(參問)하여 친견하고 탁마하는 한편, 북경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연수하며 견문을 넓혔다.
1925년 형설의 공을 쌓고 고국에 돌아온 스님은 오랜만에 내소사에 행장을 풀고 은사이신 만허 선사를 시봉하였다. 참으로 감격 어린 사제지간의 해후였다.
1927년 백양사에서 중덕(中德) 법계에 승수되었으며, 이 해 스승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여 내소사 주지직을 물려받게 되었다. 이 무렵 학명(鶴鳴) 선사께서는 월명암에 주석하고 계셨는데, 월명암은 호남의 유일한 참선도량이었다.
1931년 스님께서도 월명암으로 자리를 옮겨 하안거를 시작하였고 자주 월명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32년 내소사 앞 입암리에 계명학원을 설립하여 취학하지 못해 배우지 못한 성년을 교육하며 문맹 퇴치 운동에 횃불을 높이 들고 헌신하였다.
1935년 스님의 나이 35세 되던 해, 백양사 본말사 순회 포교사의 직책을 맡게 되자 이때부터 스님께서는 본격적인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에 나서게 되었다. 스님의 해박한 지식과 밝은 선지에서 나오는 설법으로 때[時]와 인연[緣]을 따라 청중의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하시니 스님이 가시는 법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1936년에 대덕 법계를 승수하고 45년에 종사(宗師) 법계를 받았는데, 기간에 주로 계시던 곳은 월명선원이었다. 1945년 여름, 뜻밖에 금산사 주지직에 추천되었다. 그리하여 주지에 부임은 했으나, 사찰의 종무는 삼직(三職: 교무, 총무, 재무)에게 일임하고 사내에 서래선림이란 선원을 개설하고 참선 지도와 납자의 제접에만 전념하였다.
1950년 스님의 세수 50에 이르렀다. 스님께서는 변산 서래선림으로 수행처를 옮기셨고, 6ㆍ25한국전쟁을 겪은 뒤 토굴에 은거하여 두문불출, 오직 선정삼매로써 보임(保任: 깨달음 이후에 닦는 바 없이 닦는 공부)정진에 일관하였으니, 3년을 두고 공양 때 시자가 식사만 토굴로 올려 보낼뿐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1969년 봄, 스님을 따르던 불자들이 모여 불교전등회를 창립하고 스님을 대종사로 추대하여 최고 지도자로 모셨다. 춘하추동으로 정진법회를 개최하여 7일간 혹은 3ㆍ7일간의 참선수행을 하게 되니, 스님께서는 전등회를 지도 육성하는 데 혼신의 자비를 베푸셨다.
스님의 일과는 한결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관음예참(觀音禮懺: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참회공양하는 법)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끝나면 《원각경》〈보안보살장〉을 암송하신 다음, 선정에 드신다. 그리고 아침 공양이 끝나면 대중과 차를 마시며 좌담설법이 있게 마련이다.
정진법회가 있을 때는 대중과 시간을 같이하시고, 해제 철에는 매일 대중운력이 있는데, 으레 나와 보시고 일머리를 일러주신다. 저녁 예불 끝에는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 규칙이고, 서래선림 대중에게는 반드시 《금강경》을 암송토록 지시한다. 만일 《금강경》을 외우지 못하면 제자로 받아주지 않아서 스님의 권속은 모두가 《금강경》을 외우게 마련이다.
스님께서는 주무시기 전에 다시 《금강경》 한 편을 염송하고 그날의 일과를 끝낸다. 오늘날 스님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많은 불자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만치 《금강경》을 철저히 지송하였으며, 경의 깊은 뜻에 통달하셨다.
스님께서는 일생을 소박하고 무욕 청빈한 생활로 일관하였거니와 복색도 간편하게 입으셨다. 상의는 고름을 달지 않고 매듭 단추를 달아서 즐겨 입었으며 바지는 약간 짧게 해서 대님을 매지 않은 채로 입고 다니셨다. 스님께서는 언제나 무유정법(無有定法: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정해진 법이 없다)을 설하셨고, 몸소 실천하셨다.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고, 시비에 상관하지 않았으며, 때와 연에 맞추고 정한 법 없이 대중의 근기에 따라 제접하셨다. 어느 때는 엄하고 무섭기가 서릿발 같은가 하면 어느새 할(喝: 고함 지르기)을 하기도 하고, 선정에 드셨는가 싶으면 북 광쇠를 쿵쿵 치며 염불삼매에 취하기도 하셨다. 달이 밝으면 시를 짓기도 하고 다정한 도반을 만나면 밤을 새워 곡차를 마시기도 하셨다. 타고난 선풍도골이어서 70이 훨씬 넘어서도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이 맑고 고왔다.
1970년에는 전주 한벽선림(전등회 전주지부)에 주석하셨고, 72년에는 서울 전등선림(당시 서울지부)에 주석하신 바 있다. 그 해 남산 기슭에 있는 대원정사 개원과 더불어 조실로 추대되어 대원선원에서 특별정진 법회를 개최하였고, 잠시 머물러 계시기도 했다.
1974년 음력 3월 7일, 일흔네 번째 맞이하는 스님의 생신임과 동시에 전등회가 창립된지 다섯 돌을 맞는 날 이틀 후인 9일 새벽. 아침 예불이 끝난 후 스님은 조실방에서 대중을 쭉 둘러보시고 열반을 암시하는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나는 오늘 갈란다. 내가 떠난 뒤에도 공부 열심히 하고 전등회를 잘 키워야 할 것이야.” 대중의 울음과 긴 침묵이 흐른 뒤 한 제자가 여쭈었다. “스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다 하시지요.” “별로 새삼스럽게 할 말도 없다. 다만 내가 죽거든 제사는 생일날에 지내라. 실은 생일날 가고 싶었지만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아서 오늘 가는 것이니 그렇게 해라. 그리고 혹 사리가 나오더라도 물에 띄워 없애버리고 비 같은 것은 세우지도 마라.” “그래도 오셨다가 가신 흔적으로 비는 세워야지요. 제자들의 도리도 있고요.” “굳이 세우려거든 앞면에 ‘범부 해안지비(凡夫 海眼之碑: 범부인 해안의 비)’라고 쓰고 뒷면에는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 삶과 죽음이 여기에서 나왔으나 여기에는 삶과 죽음이 없다)’라고만 써라.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스님, 열반송을 한 마디 일러주십시오.” “그런 건 군더더기 같은 소리야.” “그래도 한 말씀 일러주셔야지요.” “그러면 할 수 없지, 이르마.”
생사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生死不到處] 하나의 세계가 따로 있다네[別有一世界] 때 묻은 옷을 벗어버리자[垢衣方落盡] 비로소 밝은 달 훤할 때로다[正是月明時].
송을 읊으시고 자리에 누우신 뒤 스님께서는 마침내 입적하셨다. 아침 6시 30분. 스님의 세수 74세. 법랍은 57년이었다. 열반종이 봉래산 골짜기에 은은히 울려 퍼지고 동녘에 떠오르는 햇빛은 새벽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지은이 소개
지은이 동명(東明) 스님은 195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64년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내소사에서 사미계를,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75년 합천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백양사 등 제방선원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화두로 참구했다. 87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을 졸업한 스님은 부안 내소사 주지와 조계종 종회의원, 개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전등사 주지 겸 선원장을 맡고 있는 스님은 해안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시민선방을 개설, 사부대중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그린이 김대열(金大烈)은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국립 대만사범대학 대학원 미술학과 석사과정,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미술사 전공) 박사과정을 마쳤다(문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있다. 창작과 이론연구르 겸하고 있는 바 지금까지 11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300여 차례의 국내외 크고 작은 단체전시에 참여했으며, 작품세계는 선적 내용을 시각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종이 문인화 형성에 미친 영향〉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비움과소통 / 247쪽 / 1만 5000원
출처 : 출판사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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