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자정과쇄신결사추진본부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 스님)가 23일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초안을 발표했다.
종교간 조화의 메시지를 담은 고대 인도의 아쇼카왕석주의 문구를 모태로한 초안에서 화쟁위원회는, 다양한 종교가 상호존중과 호혜의 정신으로 보다 조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불교인들의 반성과 실천, 다짐을 강조했다.
선언문은 초안 공개 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오는 10월에 최종안이 발표된다. 화쟁위원회는 종교평화에 대한 기준과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선언문 초안 작성에는 명법스님,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교수,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박경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
화쟁위원회는 선언문을 통해 종교평화를 위해 열린진리관, 종교 다양성 존중, 전법과 전교, 공정한 공적영역에서의 종교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이라는 불교도로써 입장과 실천을 명시했다.
또 종교평화를 위해 불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등을 지키겠다고 서원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 21세기 아쇼카 선언-
지금 우리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민족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과 진리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상호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평화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연기적 세계관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불교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원적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며, 이웃종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바탕입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과 열린 정신은 기원전 3세기 중엽 인도의 아쇼카왕이 남긴 새김글에도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이건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실천해야 할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불교인은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2) 종교다양성의 존중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웃 종교와 우리는 경쟁적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동지적 관계입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할 때 공통점이 더욱 빛나 보이며 모두 진리를 향한 동반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상호존중의 호혜성은 종교다양성을 실천하는 최소한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불교인이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정법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정법수호의 정신입니다.
(3) 전법과 전교의 원칙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가장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의 일이며, 또한 가장 조심스럽게 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4) 공적영역에서의 종교 활동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의 이념과 절차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을 자유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전파하려고 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위임된 공적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적 영역의 종교 활동은 민주적 이념과 시민적 상식과 부합돼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공적 지위나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 권력이 신앙전파의 수단이 되거나 공적 장소가 신앙 전파의 무대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개인적 신앙이 공적 영역에 작용해 종교적 편향성을 낳는 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언제나 이를 유념하고 공정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5) 평화를 통한 실천
현실은 종교의 이상과 실천력을 가늠해보는 좋은 현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의 하나로 ‘사람’이 아닌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충돌은 사람의 일이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 간의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 종교의 가르침이나 지도자를 비난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화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종교간 평화를 가로막는 갈등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 불교인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평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좋은 모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상의 입장과 실천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종교평화가 정착되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분쟁의 해결에 하나의 모범적 사례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서원을 함께 세우고자 합니다.
□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락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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