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 스님 ‘참다운 지도자상’
지도자는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회 지도층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참다운 지도자는 아닙니다. 참다운 지도자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말입니다.
대중들에게 진실한 삶을 사느냐고 물었을 때, 진실하게 산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현실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됩니다.
진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진실한 삶을 살았고, 모든 성인도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삶이었지 조작적인 삶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회현상을 두고 서로가 내 생각은 옳고 남의 생각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인 스스로가 진실하지 못한 탓에 색안경을 끼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실하지 못해 사회에 갈등과 시기, 질투 등의 불신풍조가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삶이 진실하다면 사회에 이런 불신풍조가 만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에 불신풍조가 증가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니까 상대가 ‘저 사람이 나를 속이는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풍조를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서로 간에 신뢰를 구축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믿음이 행복을 만들고 신뢰를 구축하는 거름”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신뢰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깨끗하고 청정할 때 구축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모습대로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성인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해탈, 깨달음, 열반, 극락 등은 말만 다를 뿐, 모두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입니다.
돈의 행복도 아니고 명예의 행복도, 여자나 남자의 행복도 아닙니다. 이런 짧은 행복들은 언젠가 끝나는 것들이기에 영원히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행복의 세계는 부족함이 없고, 구할 것이 없고, 버릴 것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해탈의 세계요, 열반의 세계입니다.
지도자가 됐을 때 대중들을 이끌고 간다거나 따라오도록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단지 대중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목적이 나에게도 이득이 되고 상대방에도 이득이 되는 공유적인 사상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대중들은 자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될 것은 말을 조심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누구나 다 잘할 수 있습니다만 행동으로 보여주긴 어렵습니다.
이번에 끝난 지방 자치단체 선거에서 소수의 불교인이 당선된 것을 언론을 통해 보았습니다.
소수의 불자가 당선된 것은 출마한 불자가 적다는 말입니다. 적은 수의 불교인이 출마했다는 것은 현재의 불교가 그만큼 약세라는 얘깁니다.
소수의 불자만이 당선된 것을 보고 “몇 명만 당선 됐구나.”라는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 불교인들은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지은대로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에 소수의 불자 지도자들만을 배출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인재들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 뼈저리게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는 불자 인재들을 키울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불교인들 스스로가 생각을 바꿔서 사회를 리드하고 사회 사람을 계도하는 차원에서의 길을 가야지, 사회 사람이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한 지도자라고 한다면 머리를 숙일 줄 알고, 선거 때나 선거가 끝났을 때나 항상 국민을 주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국민이 무서운 줄 알고 스승으로 여겨 모실 줄 아는 생각을 가진다면 우리나라는 정말로 화기애애하고 멋있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요즘 전국이 히딩크 신드롬으로 떠들썩합니다. 그는 학연, 지연 등을 배제한 실력 우선의 선수등용과 체력을 중요시하는 기본에 충실한 지도를 했기 때문에 한국축구를 월드컵 4강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본이라고 하는 것은 집을 지을 때 맨 밑에 놓는 주춧돌과 같은 것입니다. 주춧돌이 제대로 서야만 집이 오래가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정치계에서도 학연, 지연 등을 끊어버리고 실력자를 등용한다면 우리나라는 부강해질 것입니다. 학연, 지연에 얽매는 우리의 고질병을 바꿀 수 있는 큰 지혜를 히딩크가 보여줬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을 지향하고자 한다면 기본에 충실한 히딩크적 사고를 배워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조명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이렇게 사는 것이 진실한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진실한 행동인가를 반조해 보아야 합니다. 남의 기준에 맞춰서도 안 됩니다. 내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반조해 보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쳐야 합니다.
불교에는 참회, 기도, 염불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부터 참회하고 기도 염불하면서 아상과 인상·중생상·수좌상 등 모든 상을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 즉 거짓이 없는 진실의 세계를 돌출해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화엄경》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부처나 중생이나 마음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생각을 바꿨기 때문에 성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전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나와 남이 공감하는 것이 성인의 생각입니다. 반면에 내 생각만 옳고 남의 생각은 옳지 못하다는 것은 범부의 생각입니다.
극락과 지옥은 자기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수십 년 수행해도 허사입니다. 진실한 자기 반조는 누가 경을 읽어 주거나 말해 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단 십분이라도 자기를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단 십분이라도 ‘이뭣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진실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만불신문 60호(2002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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