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현 스님(연꽃마을 이사장)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돈과 명예, 권력과 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으면 행복한 사람일까요? 소유가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유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더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되고, 또 더 많은 소유를 위하여 욕심을 내야 하니까요.
불교에서는 인간이 경계해야 할 5가지 욕망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욕(財物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그리고 명예욕(名譽慾)입니다.
이 5가지 모두가 인간이 평생동안 갖고자 원하는 것들입니다만 여기에는 하나 하나에 인간을 해치는 독이 묻어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소유의 완성이 아니고, 소유하고자 노력하는 진행형의 모습입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 아닐까요.
그러면 인간은 왜 살까요?
행복하기 위해서 살겠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비전이 있어야 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열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자아실현의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즉 자아실현을 위하여 자신을 계발해야 합니다.
등반가로, 권투선수로, 작가로, 화가로, 종교인으로, 과학자로, 사회복지사로, 군인으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자아실현의 장소를 선택하여 땀을 흘려야 되겠지요.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고,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나를 끊임없이 계발하는 것, 여기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직업은 자기 실현의 장소요, 행복을 엮어내는 복전(福田)이고, 공동체를 실천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아 실현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개는 개답게, 소는 소답게, 말은 말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은 사람다워야 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 그것은 질서와 순리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지키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자 책임과 의무입니다. 단 예의는 지방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일반동물의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에 ‘사람다운’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차별을 인정해야 하고, 상하를 인정해야 하고, 전후를 인정해야 하는 상대적 관계입니다. 얼굴을 붉히는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자기 표현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반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성은 질서와 예의를 지키는 기본 자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그리 쉽지 만도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결국 사람이란 삶의 뜻을 알려 하고, 삶의 값을 하려 하고, 그리고 자유롭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수많은 종교와 문화, 그리고 사회복지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지요.
종교는 그 시대의 얼이고, 그 시대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각 교단이 밝힌 대로라면 종교인구가 3000만 명이 넘는 종교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법당에는 자비가 넘쳐나고, 교회에서는 사랑이 너울거립니다. 그런데 교회와 사찰에 다니는 신자로 구성된 이 사회는 왜 이리 삭막하고 각박할까요? 자비와 사랑은 사찰과 교회 안에서만 존재되는 전유물일까요?
실천이 없는 종교는 모래로 밥을 짓는 것처럼 해독을 준다는 어느 선사의 준엄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여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종교이며, 극락정토를 예토(穢土)에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기독교도 하늘의 영광을 땅에서 구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중생이 고통받는 현장에는 종교의 자비와 사랑이 머물지 않는 것일까요?
사회는 도덕과 윤리가 회복 불가능의 상태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종교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 종교의 이상과 사회의 현실은 왜 조화로운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까요? 성장 위주의 교단 운영은 교회나 사찰이 부를 축적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성장을 지원해 준 신도들에게 정신적 부를 제공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겸허하게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처럼 종교의 사회복지 필요성이 강조되는 때도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회복지 대상자는 가난한 사람, 고아, 부랑인, 장애자, 무의무탁자 등 요 보호자가 주요 대상이었으나, 현재의 사회복지 대상은 사회적 불평등, 재활, 자녀양육, 가족문제, 남녀 차별 문제, 지역사회 문제 등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전개되는 전반적 대인 서비스 문제가 사회복지의 중심 과제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교리를 구체적으로 사회에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종교의 사회복지 활동참여가 그 종교의 성장과 발전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다종교사회에서 종교의 사회복지 참여에 부정적인 논의도 있지만, 종교적 가르침의 강요를 자제하고, 종교 다원주의의 입장에서 포용성과 학문적 사회복지의 일반성을 갖춰 인간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한다면, 공적부조가 미흡한 현실에서 지역사회에서의 종교 조직은 문제 해결을 위한 매개자, 촉매자로서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종파적 가르침에 따른 중생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교리적 특성과 조직, 전달체계를 적극 활용하여, 사회복지사업에 참여하여야 하겠습니다. 정부 주도의 공공 복지와 민간 복지를 대별할 때 상호보완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집단이 종교 단체인 만큼, 지역사회복지 발전을 위하여 종교 사회복지의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해야겠습니다.
출처 ; 만불신문 71호(2002년 12월 1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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