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총 스님(조계종 포교원장)
여러 가지 목표나 계획을 세우게 되지만,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래가지 않아 처음의 굳은 마음은 옅어지고 맙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방향키도 없이 떠다니는 돛단배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많은 불자님들은 서원(誓願)을 세웁니다. 올바른 삶의 영위를 위해 큰 뜻을 세우고 반드시 이루어야겠다는 마음을 서원이라 하지요. 원을 일으킨다고 해서 발원(發願)이라고도 합니다. 서원을 세우기에 앞서 참회정진으로 새해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짓는 죄와 허물을 여러 사람들 앞에 숨김없이 공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참(懺)이라 하고, 그 죄를 뉘우치고 부처님이나 스승 또는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을 회(悔)라 하여 참회라 부릅니다. 부처님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조건으로 참회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는 그때마다 참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참회의 기회를 마련했는데 보름마다 행해지는 자기비판을 포살(布薩)이라 하고, 매년 안거를 마치고 행해지는 상호비판을 자자(自恣)라 하였습니다.
말법시대에는 특히 참회정진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한결같이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속된 말로 배부르고 등 따뜻하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니지요. 잘 산다는 것은 내가 지은 업장을 참회로 다 녹여내고 인과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까. 흔히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육신인데 어찌해서 왜 저마다 사는 모습이나 처해진 상황이 다른 것입니까?”하고 제게 묻습니다. 그것은 행위에 따라 생기는 업(嶪)의 본성에 따른 것입니다. ‘업은 외상도 없고 에누리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有情物)들은 제각기 지은 업력에 의하여 각자의 환경과 그 자신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11살 어린 나이로 통도사에 출가했을 때 자운 큰스님께서 삼천 배 참회를 시키셨습니다. 저는 어린 생각에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왜 참회를 하라고 하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왜 참회를 해야 하는가?’하는 것이 늘 의문으로 남아있었으나, 세월이 흐르고 살아오면서 저는 참회의 큰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회는 지난 악업을 숨김없이 드러내 뉘우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수많은 업장을 쌓아왔습니다. 금생에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요!” 하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어머니에게 아픔을 드리고 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길거리를 걷다가 본의 아니게 지렁이나 개미를 밟아 죽인 적도 있을 것이고, 작은 거짓말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하는 참회는 수행의 시작이며 근본입니다. 참회는 미혹한 나를 깨달은 나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목욕과도 같은 것입니다.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해서 다시는 몸을 더럽히지 않고 바른 자리로 나아가려는 수행이 바로 참회입니다. 참회가 밑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바른 서원을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네 중생들은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합니다. 좋은 경험도 하게 되고 나쁜 경험도 합니다. 그러한 경험이 쌓이면 흔히 습관이라 말하는 습(習)이 됩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그 경험을 잊느냐 잊지 않느냐 하는데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중생은 전생의 과보를 잊고 또 그러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지만, 부처님은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잘못을 참회하며 좋은 업을 쌓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참회정진과 함께 잘못된 습을 되뇌며 습을 바꿔나가는 노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습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수행입니다. 본래 우리의 성품이 부처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어둠의 먹구름만 잔뜩 끼여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선 눈과 귀를 열어 부처님 법을 가까이 합시다. 불교대학 강의도 좋고, 신문이나 라디오 등 불교매체를 통해도 좋습니다. 항상 부처님 말씀 속에서 살면서 부처님과 같이 되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중생의 습을 버리지 못하면 영원히 중생이요, 부처의 모습대로 산다면 부처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시간을 귀하게 여겨 알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법 만나는 일도 게을리 하지 말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보살행도 실천하며 살아야합니다. 주위 사람이 행복하면 내 작은 마음도 더불어 행복해집니다. 주위 사람들이 불행하면 내 가족도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출요경(出曜經)》에서 부처님은 “사람이 악을 저질렀어도 선한 행으로 그것을 없애면 구름 사라진 뒤의 달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회가 업장(業障)을 녹이는 수행이라면, 선한 행은 마음의 먹구름을 몰아내는 맑은 바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살만해지니까 복지라는 학문도 생기고 관련 부처도 생겨났지만 불법이 본래 복지법입니다. 중생 잘 살도록 이끌어주는 법 아닙니까. 부처님 법이야말로 영원한 복지입니다. 육체적인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복지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전해서 생활이 안정되도록 해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현대의 복지는 주고 또 주어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받고 또 받아도 한없이 부족합니다. 항상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윤회의 고리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에게 한번도 해를 입힌 일이 없는데 하는 일마다 사기를 당하고 자손이 해를 입는 등 팔자가 좋지 않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법구경(法句經)》에 이르기를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받는다. 악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악한 사람은 죄를 받는다.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화를 만난다. 선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선행이 가을에 여물은 밤송이처럼 익고 또 익어서 탁 터지는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참회하고 좋은 습관으로 선업을 닦아 나가겠다는 서원이야말로 삶 전체가 복전(福田)이 되게 하는 깨끗하고 진실한 서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제까지고 바른길을 좇아 나아가다보면 반드시 좋은 때는 오고 맙니다. 성불합시다.
법문 출처 ; 만불신문 75호(2003년 2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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