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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나 없는 진리가 상생윤리”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천운 스님(전 광주 향림사 조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160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불교 경전이 너무 방대하고,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어렵게만 느끼고 있습니다.

불교에 귀의해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현재 사회적으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 중에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계층 간의 갈등, 남북한 문제, 지역감정 등 제반 사회 현안 또한 상생(相生)의 입장에서 접근하면 풀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것은 무아(無我)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물질적으로 봤을 때에는 무상(無常)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은 허상일 뿐 실체가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 즉,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모든 만물은 서로 얽혀서 살다가 흩어지고, 다시 어울림을 반복한다는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사람들을 대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서로 화합하며 융화되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내가 조금 넉넉하면 남을 도와야 하고, 내 몸이 괴롭더라도 남을 도울 일이 있으면 가서 얼른 도와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안 하려고 하면 자기도 타성에 젖어버릴 뿐 아니라 남들도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선택하고 하는 것에 있어서도 타성에 젖어서는 안됩니다. 요즘 직업이 세계적으로 보면 5만여 종이나 되는데, 그 중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직업은 2만 여종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려면 이 모든 직업들이 수행돼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국민들도 먹고사는 것에 매달리는 단계는 지났다고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학교에서 제대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사회의 직업현장에서는 별로 소용이 되지 않거나, 많은 비용을 들여 석·박사를 배출해도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들 양복입고, 넥타이 메고, 펜대 잡는 일만 하려 한다면, 정말 사회적으로 필요한 육체노동은 누가 한단 말입니까. 그러다 보니 많은 노동집약산업들이 중국 등 해외로 이전되고, 국내의 중소기업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다가는 우리나라 1차산업 자체가 공동화(空洞化) 될 것이란 우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대로 이 세상을 살다보면 세상사가 참 편안합니다. 사람이 자기 할 도리를 다 하니 나쁠 것이 없고 떳떳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도 세워지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물건은 나눠 쓸 줄 알고, 남들이 꺼려하는 일들을 솔선수범(率先垂範) 할 줄 알게 됩니다. 또한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 왔지, 저런 오욕락(五慾樂)에 치우친 짓을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돼 자연스레 사회정화에도 도움이 됩니다.

정치라는 것도 서로 도우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부처님 법을 조금만 안다면 ‘로또복권’ 같은 것을 발행해 국민들이 헛된 망상에 빠지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구에서 들여온 자본주의는 기독교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동양사상은 공동체의 윤리를 중시하는데 반해, 서구의 자본주의는 자본(경제)을 그 지상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사상에서는 인간이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근본목적을 정당하게 벌어들인 재화(財貨)를 다시 사회에 회향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해탈을 위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는다는데 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불교의 사회복지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식 자본주의는 그 저변에 저급한 쾌락(성문화)을 내포하고 있음으로 해서 막대한 부를 쌓아도 결국 정신은 점점 황폐화되는 것입니다. 결국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추종하는 현대문명과 서구문화가 발달되면 발달될수록 악의 문화도 따라서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해야 하는데 신용카드라는 게 생겨 자기씀씀이가 너무 커져 버리고, 핸드폰이 생겨서 많은 정보를 빨리 받아 유익하게 되겠지만 그것을 악용해 원조교제와 매춘, 사기·도둑질 등 헛된 짓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하지 못한 인간의 양면성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가 되고 있는 ‘개혁(改革)’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개혁이란 하루 아침에, 그것도 젊은이들의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기성세대들이 오랜동안 체득해온 연륜과 체험이 존중되는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기득권층들이 자기의 창자를 떼어내는 양보의 고통이 수반돼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개혁이란 기성세대의 경험, 젊은이들의 머리, 기득권층의 양보, 이 삼두마차가 조화를 이룰 때 성공할 수 있음을 경전과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방등부(方等部) 계통의 경전들을 보면 불자들이 그러한 공동체 윤리를 지키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의 결론을 말하자면 “이 세상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유(萬有)’ 또는 ‘만법(萬法)’이라고 합니다. 즉 모든 것은 공동체(共同體)를 위하여 쓰여져야 되며, 그것이 화합(和合)을 위해서 쓰여지면 바람직하지만, 화합하지 못하고 독식(獨食)할 때 곧 착취(搾取)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세상은 말세(末世) 중에 말세이고, 말법(末法) 중에 말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올곧게 살려고 해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윤리와 지식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 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욕(忍辱)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그렇지 못하고 적응이 안된 사람은 부랑자(浮浪者)자가 되고 어질지 못합니다. 어진 생각이 모두 떠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가 매우 곤란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너 자신이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스스로가 부처이지 부처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부처(佛性)를 밝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등명(自燈明)’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불자들 모두가 스스로 부처라는 사명감을 갖고 모든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에 앞장서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에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출처 : 만불신문 76호(2003년 2월 22일자)

2010-11-25 / 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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