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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별심 벗어버리면 내 가족 내 이웃이 부처”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현해 스님(월정사 회주)

‘법문(法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불자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법회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법문은 무슨 뜻입니까. ‘법을 공부하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까. 이 법(法)이라 함은 부처님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불자들에게는 신앙(信仰)의 대상이고, 귀의(歸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법에 문이 있다면 들어가 앉을 방(房)도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 팔만 사천 경전을 다 들어봐도 법에 방이 있다거나, 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법문이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법에 들어가는 문도 없을뿐더러 부처님 법이 놓여 있는 방도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우주 만물이 법이요, 누구나 한 생각 바로 잡고, 한 마음 다시 본다면 시시처처(時時處處)에서 이 법을 깨칠 수 있습니다.

‘자비를 닦고 덕을 쌓으면 팔부신장 기뻐하고, 염불하고 경 읽으면 괴로움이 소멸하네. 성현들이 이같이 와서 맞아주시니, 옮기는 발자국마다 극락정토 이룩되네.’

여러분들께서 원력을 세우고 스님을 따라 부처님께 귀의하는 그 자리가 바로 극락이요, 천당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제자인 스님들을 믿고 수행하고 정진을 쉬지 않으면 바로 그 사람은 삼보(三寶)와 팔부신장(八部神將)의 보호를 받게 돼 있어요. 그 사람의 생활은 그대로가 극락정토의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착한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그것 모두는 육체를 통해 하게 돼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즉 육근(六根, 눈·귀·코·혀·피부·뜻)을 통해 업을 짓게 돼 있습니다. 눈으로는 형상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혀로는 맛을 알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피부로는 곱고 거침을 구별하며, 뜻으로는 좋고 나쁨을 압니다. 눈에 좋은 것만 찾으니까 업을 짓고, 뜻으로 밉다 곱다 하니까 업을 짓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육신을 없애고 육신을 통해 업을 짓지 않는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부처님은 왜 죽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짓는 업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자살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몸을 통해 죄를 짓고 살지만 실제로는 보살행을 하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 또한, 우리의 감각기관이 존재하는 몸을 통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어떻습니까.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고, 부정부패로 무질서한 이 세상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땅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이 땅은 보살행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라고 했습니다. 또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처로도 가장 적합하다고 했습니다.

천당에 가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고통이 없기 때문에 수행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옥은 너무나 괴로워서 수행할 생각을 못 일으킨다고 합니다. 아귀세상은 너무나 배가 고프기 때문에 항상 먹을 것만 생각하느라 수행할 생각을 못 일으킨다고 합니다. 축생은 지혜가 없어서 수행의지가 없다고 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뒤섞여 있고, 선과 악이 교차하는 오직 이 사바세계가 성불할 수 있는 최적지(最適地)라고 했습니다. 또한 선악의 구별을 할 수 있고, 쓴맛과 단맛을 구별할 줄 아는 이 철부지 중생만이 부처님 법을 깨우칠 수 있는 선근(善根)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원효 스님의 저서인《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에 보면 원효 스님은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중생이 하나도 없고 부처만 있다면 부처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고통 받고 힘들어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괴로워하는 중생이 있고, 사바세계가 불편부당(不偏不黨)하지 않고, 부정부패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오히려 더 빛나고 가치 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 로 육근이라는 것이 고통을 가져오고 악업을 짓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선업을 짓고 보살행을 하고 정진수행을 하는 것도 육근입니다. 사바세계 또한 고통을 가져오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국정토를 이룰 수 있는 터전이기도 한 것입니다.

《법화경 묘음보살품(法華經妙音菩薩品)》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바세계에는 높고 낮음(高下)이 너무 심해서 평등하지 않음이 너무 심하고, 더러움과 악함(汚惡)이 충만해서 부처님까지도 비겁하고 작게 보이느니라. 보살의 몸도 작게 보이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진 자와 없는 자’, ‘ 귀한 자와 천한 자’의 구별이 있어서 살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부처님을 보면 부처님까지도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이 말법세상(末法世上)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만약에 사람이 모양으로 부처를 구하거나 음성으로 부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행을 하는 것이니 너의 부처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욕심의 눈으로 보면 부처는 돌덩어리요, 욕심의 귀로 법문을 들으면 소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원력의 마음, 신심 넘치는 마음으로 보고 들으면 모든 것이 부처요, 모든 소리가 무량한 법문이요, 무량한 공덕의 소리가 됩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새소리 물소리가 부처님 말씀으로 들립니다. 한 마음 돌이켜 생각하면 내 가족, 내 이웃이 모두 보살이고 부처입니다. 부처님 생각을 하며 살아가면 가정이 그대로가 부처님 터전이고 극락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보여주고 깨닫게 해 도에 들게 하려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고 배워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불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86호(2003년 7월 12일자)에서 옮겨 왔습니다.

2011-01-28 / 5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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