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여 스님(축서사 주지)
최근 우리 경제가 어렵고 정치도 혼란스럽습니다. 정신적 불안과 괴로움을 달래려고 절이나 수행처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야흐로 수행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선을 한다’, ‘수행을 한다’, ‘마음공부를 한다’ 하는 것들은 바로 ‘마음을 닦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흔히 수행자들이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공부 중 으뜸인 공부가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그럼 마음을 어떻게 닦느냐 이것이 문제지요. 마음은 형상이 없어 물건을 닦듯이 쉽게 닦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어둡고 탁한 마음을 밝히면 됩니다. 이것이 마음 닦는 방법입니다. 중생은 늘 마음을 흐리게 하는 번뇌망상 때문에 마음을 잡지 못합니다. 이 번뇌망상을 없애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최상은 화두참선입니다. 그러면 화두가 무엇이냐? 화두는 참선자가 과제를 체득해서 깨쳐야 할 문제입니다. 간화선은 현대인들에게도 알맞은 현대적 수행법입니다. 현대인들은 옛사람들에 비해 근기도 약하고 발심도 잘 못하며 신심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의지할 수단으로 화두를 써야 합니다. 흔히들 간화선을 어렵다고 하는데 선지식으로부터 제대로 지도를 받는다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화두는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첫째, 대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입니다. 크게 일으키면 크게 깨치고 적게 일으키면 적게 깨칩니다. 둘째, 간절해야 합니다. 며칠 굶은 이가 밥을 생각하듯, 사막에서 물을 찾듯 절실해야 합니다. 셋째, 화두는 꾸준하게 쉼없이 들어야 합니다. 밤낮없이 여여하고 꾸준하게 화두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고집스러워야 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하다보면 어느 날 진짜 의심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화두에 진의가 든다’라고 하는데 이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놓으려 해도 놓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진짜 의심이 나야 화두를 제대로 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되다 말다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느냐 하면 첫째는 발심이 안돼서입니다. 발심은 발보리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이 “화두 안 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발심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신심이 돈독하지 않아서입니다. 화두를 참구하면 깨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서 분별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됩니다. 암실에 빛이 조금만 들어가도 사진을 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셋째는 대분심이 없어서입니다. 분심을 내야 합니다‘. 왜 나는 공부가 안 되나, 조사님들도 다하는데 왜 나만 안될까?’ 하는 분한 마음을 내서 애쓰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늘 모자라고 어리석은 짓만 하던 ‘주리반특가’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일념 수행해 정각을 얻었습니다. 이런 분들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여러분들은 왜 안합니까?
넷째는 용맹심을 내야 합니다. 특히 근기가 부족할수록 용맹정진해야 합니다. 흔히들 잠 안자고 하는 용맹정진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어떤 난관에도 끝까지 용맹스럽게 밀고 나가는 것이 용맹정진입니다.
이렇게 참선자가 화두를 깨치면 몸이 가볍고 편안해지며 평소 몰랐던 것들도 식(識)이 맑아져 심안(心眼)이 생깁니다. 하지만 늘 머무르지 않고 늘 자신을 점검하면서 꾸준히 참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한 번 마음공부를 통해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03호(2004년 3월 13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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