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웅 스님(미국 버클리 육조사 주지)
참 법문은 일상생활 속에서 듣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이야기 할 때나 물건을 사고 팔 때도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문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문을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관념에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관념의 뿌리가 비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눈과 귀가 열리고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모든 중생이 자기와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믿지 않고 바깥에서 자기가 만든 부처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눈이 막히고 귀가 막히는 것입니다.
《천수경》에 “칼산지옥에 내가 가면 칼산이 저절로 무너지고, 화탕지옥에 가면 화탕이 저절로 없어지며, 모든 지옥에 가면 지옥이 저절로 마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선승에게 이 구절은 “내 안에 쌓여 있는 어리석음을 없애고 내가 주인임을 깨닫게 되면 지옥도 극락으로 변한다.”는 선법문입니다. 내가 비어있음을 경험하면 칼산도, 화탕도, 지옥도,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도 비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나의 참주인이 되면 시장상인들이 춤추는 불·보살로 보이고, 시끌벅적한 시장이 극락이요 불국토로 보이게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불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이상향에 묶여 불교가 생활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이 땅에 스며들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는 물이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 안에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무명 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무명에 덮인 불성이 있는 것을 모르고 등지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이 사회에서 어떻게 선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 저의 최근 화두입니다. 저는 생활 속에 불교가 있음을 확연히 경험했습니다. 중생의 생활이 불교를 떠나 있지 않은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불교가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선불교는 현실과 괴리돼 뒷방에서 혼자 하는 수행으로 인식돼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선은 생활 속에 있는 것이지 생활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을 때나 시장 갈 때나 친구를 만날 때나 항상 선은 그 속에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를 붙들고 있는 한 그것이 내 마음을 가려서 불성을 볼 수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를 버리면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사실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들으면 그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수행은 스승을 믿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스승을 믿어야 내 생각을 안 내게 됩니다. 생각을 안내면 아상이 없어져 공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도 불성이 있으니 나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혼자 수행합니다. 그러면 절대 공부가 늘지 않습니다. 스승을 믿으면 스승이 항상 나를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삿된 생각이나 알음알이를 낼 수 없게 됩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에서 내 불성의 싹이 나옵니다. 여러 불자님들도 모두 깨달음의 씨앗이 있는데 그것이 나오려고 하면 관념의 생각들이 뭉개버립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스승의 법문이 내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지만 믿음이 생기고 난 뒤부터는 하찮은 말이라도 나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믿음은 내 생각을 없애고 아만을 버리게 만듭니다. 아만이 없어지니 불성이 되살아나 의심이 생깁니다. 이 때 화두를 들면 의심이 끊어져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생활 속에 불교가 다시 살아납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생활 속에서 수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11호(2004년 7월 10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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