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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주당 묘엄 명사 영결식 및 다비식 엄수 [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6일 수원 봉녕사서, 3천여 대중 참여 


세주당 묘엄 명사의 영결식이 12월 6일 오전 11시 수원 봉녕사에서 엄수되었다.

영결식은 원로의원 진제, 고산, 설정 대종사와 총무원장 자승스님, 종회의장 보선스님, 교육원장 현응스님, 불교티비 이사장 성우스님과 전국 교구본사 주지스님 등 3천여 사부대중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묘엄 명사는 1931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15살 무렵 성철스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1945년 월혜스님을 은사로, 성철스님을 계사로 수계 득도후, 성철스님과 청담스님, 자운스님, 운허스님께 법을 배웠다. 이후에도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아 200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전 종정 예하로부터 종단 사상 최초로 비구니 스님의 최고 법계인 명사를 품서 받았다.

스님은 현대식 교육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혀 불교를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가르치기 위해 마산대,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공부한 후 현재의 봉녕사를 비구니승가교육의 요람으로 키워내셨다.

묘엄명사는 출가 이후 60여 성상 동안 원력을 다해 후학을 가르치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경지에서 소요(逍遙)하셨던 스님은 원적에 드시기 전 “마음공부는 상대적인 부처님을 뵙고 절대적인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자기를 단속하여 인천의 사표가 되고 생사에 자재하여 중생을 제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도림 법전예하께서는 원로의원 진제스님이 대독한 법어를 통해 “오늘 명사는 적멸을 통해 해탈의 자유를 얻어 임운자재(任運自在)하게 되었습니다.”며 “이제 근진(根塵)을 벗어났으니 가는 곳 마다 원통자재(圓通自在)하셨던 그 주인옹(主人翁)으로 사중득활(死中得活)의 소식을 일기일경(一機一境)으로 한 번 나투십시오.“라고 추모했다.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추도사를 통해 “스님의 일생은 비구니 승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원력의 실천이었기에 엄격한 수행자의 표상으로 충분하였음에도, 도심견고(道心堅固)하여 수요견성(須要見性)을 위한 구도행을 멈추지 않았으니, 주석한 곳곳은 명실 공히 승가교육의 요람이 아닐 수 없으며, 오늘날 우리 종문의 수많은 비구니를 길러내신 진정으로 이 세간을 맡으신 분[世主]이며, 수행과 교육으로 불회상을 장엄하신 이 시대의 ‘대애도 고타미(大愛道 瞿曇彌)’이십니다.”라며 묘엄명사의 수행과 가르침을 추모했다.

전국비구니 회장 명우스님은 영결사에서 “스님께서 세연을 다하여 떠나시던 날, 스님께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계에는 큰 별이 하나 떨어진 것이다.”며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신 장엄한 도량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스님을 보내드려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도제양성과 지계청정, 중생제도의 서원을 잊지 마시고, 학처럼 높은 기상과 우아한 자태로 속히 돌아오소서”라며 묘엄명사와의 짧은 헤어짐을 아쉬워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전계화상 고산스님은 “지계정신이 점점 엷어져 가는 이 시대에 한국 승가의 수행 풍토 진작을 위해 새로운 장을 마련했고, 계율정신의 연구와 실천을 위해 제자들에게 신심과 원력을 북돋아 주었다.”며 “60여 성상의 아낌 없으셨던 그 원력은 수많은 출가자들의 모범이 되었고, 스님께서 평생 교육도량으로 일구신 이곳에서 스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사무대중이 법향을 피워가며 스님을 애도한다.”며 묘엄명사의 입적을 추모했다.

영결식이 끝난 후 묘엄명사의 법구는 대적광전을 3배 올린 후, 만장과 위패를 앞세우고 봉녕사 다비장으로 이운해 다비식을 진행했다. 스님의 초재는 12월 8일(음. 11월 14일)이며 49재는 1월 19일(음. 12월 26일) 봉녕사에서 거행된다.

 

2011-12-07 / 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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