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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 불교신자가 본 불교와 현대사회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데이비드 로이 지음 / 허우성 옮김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나는 왜 고통스러울까? 왜 항상 돈이 부족할까? 우리는 왜 명성을 얻고 싶어 하나? 현대인이 시간에 쫓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섹스에 매달릴까?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 걸까? 어쩌다 생태계가 이렇게 파괴되었을까?생명공학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이 모든 질문들에 불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 교양 강의

붓다가 미국에 살았다면? 현란한 광고와 자극적인 이미지, 자본의 논리로 작동되는 사회체제, 국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정부를 보고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붓다는 혁명가였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와 사회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혁신적인 가르침을 펼쳤다. 그로부터 2,6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가 전한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할까?

저자는 불교의 핵심이 ‘사람들의 고(苦)를 줄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불교가 지금 의미 있으려면 ‘현대의 고’를 줄이는 데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돈, 섹스, 시간, 음식, 명성, 전쟁과 같이 우리 삶과 구체적으로 만나는 지점들에서 불교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경전과 역사를 넘나들며 우리시대와 통하는 살아 있는 불교를 찾아 헤맨 끝에 저자가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 과연 불교는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한 생각거리들을 저자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돈과 명성에 목을 매는 이유

논의의 출발점은 불교의 ‘무아’(無我)이다. 무아는 우리가 보통 변치 않는 ‘나’라고 인식하는 게 실제로는 없다는 개념으로, 우리의 상식에 정면 도전한다. 그럼 불교에서는 왜 ‘나’가 없다고 하는 걸까? 세상 모든 것은 서로 맺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영양을 주는 음식, 생명을 준 부모, 기쁨을 주는 친구, 숨 쉴 공기를 주는 나무 등을 비롯한 세상 모든 것으로 꽉 짜여 있는 그물의 어느 한 지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이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나’로 여긴다. 이렇게 스스로를 왕따시킨 결과 마음에 구멍이 뚫린다. 자기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데서 오는 극심한 결핍감을 느끼며 “살아 있지만 죽은 목숨”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돈과 명성에 목을 매는 건 이 둘이 그 구멍을 메울 수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돈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 부자나, 더 큰 명성을 얻고 싶어 하지 않는 유명인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수단들이 진정한 치유책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없는 걸까? 혹시 이런 노력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닐까?

우리는 ‘나’가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시에 ‘나’가 없는데 어떻게 ‘구멍’이 있을 수 있는지, 우리가 존재의 비어 있는 곳을 과연 메울 수 있는지도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하얀 종이를 볼 때마다 거기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을 볼 수 있을 때까지(184쪽 틱낫한 글 참고).

섹스의 불편한 진실

불교 승려는 섹스를 한 사실이 들통 나면 승려 집단에서 쫓겨난다. 왜 섹스는 그렇게 큰 잘못이 되었을까? 승려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섹스 덕분인데. 이를 알기 위해선 불교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섹스가 승려 집단에 초래할 두 가지 위험을 주목한다. 하나는 섹스의 결과 태어난 아이 문제이다. 아이가 생겨나면 승려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 집중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는 일본불교에서 볼 수 있는 가족 사업화된 사찰이다. 그렇게 되면 돈이 되는 장례식과 추도식을 뺀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승려와 후원자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승려 집단은 불교도 후원자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형식으로 발전해왔는데, 후원자들이 승려에게 더 큰 순결성을 요구한 결과 승려들의 순결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승려가 아닌 우리들은 제약 없이 섹스를 해도 되는 걸까? 불교의 관점에서 답하면 ‘그렇지 않다.’ 그런 행위로는 고(苦)를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신화에 빠져든 나머지 섹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적 친밀감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섹스는 자연의 속임수이고, 낭만적 사랑이란 그 속임수 위에 덧칠해놓은 정서적 광택이다.” 낭만적 사랑이 끝난 자리에 자녀 양육과 같은 책임만 남았을 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저자가 섹스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그것의 장점을 인정한다. 다만 “섹스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신화가 감추고 있는 “섹스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우리는 왜 전쟁을 멈출 수 없는가

전쟁의 이유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분석은 지금까지 자주 있어왔다. 그런 분석들에서는 전쟁을 사회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흐르게 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권력자의 의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세계를 손 안에 두려는 강대국의 욕망 등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한 인간으로서도 전쟁에 매혹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채널 서핑이나 쇼핑에 빠진 채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사회 구조 안에서 정해진 위치에 따라 살면 되었던 전통사회와는 달리, 지금 우리는 홀로 내던져진 존재가 되어 각자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 쉽지 않은 과업을 달성하지 못한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권태와 공허만 남는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라면 다르다. 일단 적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편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이 “따스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유대감”과 생존본능은 우리의 주의를 권태와 공허에서 떼어놓는다. 더군다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정의 혹은 신의 사명 같은 환영을 전쟁에 덧씌워놓는다면, 선의 편에서 우주적 차원의 전쟁에 참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의기양양해지겠는가! 그러한 “영적 투쟁은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영웅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 때문에 저자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인생의 공허를 직시했다는 점에서는 옳다고 본다. 하지만 전쟁이 불러오는 비참은 그쳐야 하며,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처방은 망상으로 본질을 가려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만일 전쟁이 결핍에서 오는 집단 문제에 대한 집단 반응이라면, 우리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삶의 공허에 대처할 수 있는 근본적인 영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백 번 생각보다 한 번 행동을

“나는 지옥에 좌선만 하는 사람을 위한 특별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시종일관 바른 앎을 강조하지만, 아는 데서 그치는 건 불교도의 길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는 만큼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개인의 복을 비는 구복불교와 수행 제일주의로 기운 나머지 사회 참여를 소홀히 하는 한국불교계를 향한 따끔한 지적처럼 들린다. ‘보살도’(bodhisattva path)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보자.

“보살은 다른 생명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완전한 깨달음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보살에겐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의 깨달음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해방을 다른 사람들의 해방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살도에 대한 이런 이해는 카르마, 곧 업(業)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여실히 반영한다. 많은 사람들이 업을 ‘다음 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 정도로 이해하지만, 사실 업은 바로 지금 생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행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스피노자)인 것처럼 우리는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게 아니다. 죄 그 자체가 우리에게 벌이다.” 업 이론은 삶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 당신의 마음이 달라지면 세계도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에 다르게 반응하면, 세계도 우리에게 다르게 반응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인식을 인간세계에서 지구 전체로 확장해야 한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전 지구적 위험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준을 이미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석 위에 앉아 참선만 하느니 차라리 남극에서 오존 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자외선에 화상을 입을 것이며, 툰드라 지방에 가서 녹아내리는 영구동토층 위에 뒹굴어라.

저자는 우리시대와 통하는 살아 있는 불교를 찾아 경전과 역사를 두루 섭렵한다. 그 결과 현대사회의 애매한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모든 것은 변하는 과정 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저자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길 원한다면 우리가 맞닥뜨린 딜레마들에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거리들을 불교에서 찾아 우리에게 건네주고 있다.

<불광출판사 펴냄 / 240쪽/ 1만 5천원> |

 

2012-03-02 / 2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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