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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과 공리의 시대에 외친 무의 윤리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김영진 지음 『불교와 무의 근대』

장타이옌의 불교와 중국근대혁명에 관한 본격 연구서

장타이옌章太炎(1869~1936), 어떤 이는 청대 학술의 대가이자 국학대사國學大師로, 혹은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 루쉰魯迅의 스승으로 그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는 청말을 대표하는 고문경학자이자 국학자였던 동시에 유식불교에 정통한 불교학자였고, 또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시대에 구멍을 뚫어야’ 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스승으로서 그들 앞에 서야 했던 혁명가였다. 당대에 닥친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해야 했던 중국 근대불교와 고승들에 관해 꾸준히 연구해 온 젊은 학자 김영진(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은 이 책 『불교와 무의 근대: 장타이옌의 불교와 중국근대혁명』을 통해 동도서기조차 외면당하며 서도서기의 주장이 소리를 높이던 시대에 가장 오래된 종교이자 학문이었던 불교를 통해 현실을 구제하려 했던 장타이옌의 생애와 혁명이론을 정밀하게 풀어냈다. 장타이옌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량치차오梁啓超만큼의 학술적 성취와 그를 뛰어넘는 사상을 가졌음에도 장타이옌에 관한 국내 연구가 활발치 못했던 실정에서 이 책은 중국근대혁명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장타이옌을 새롭게 발견해 내는 동시에 그와 함께 거론되는 여러 사상가들(탄쓰퉁, 타이쉬, 량치차오, 쇼펜하우어 등)을 통해 근대 중국을 형성한 사상의 흐름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무無’라는, 근대를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부정否定 혹은 거부다.

무는 불교의 옷을 입고 장타이옌에게 왔고 그것은 그의 정치활동에 원동력이 되었다. 무가 있었기에 그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서구의 침략을 거부할 수 있었고, 무조건적인 진보라는 환상을 심어 주는 진화론을 부정할 수 있었다. 또한 문명, 진보, 진화 등의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에 끄달리는 ‘나’를 부정할 수 있었고, 나를 노예로 전락시키고 마는 신앙이나 임의로 구성된 것에 불과한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도 부정할 수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하다. 그런 것 없다고 말해 버림으로써 그런 것에 대한 열망을 식혀 버리니 말이다(205쪽).” 하지만 이것이 근대 시기 중국불교가 수행한 역할이었다. “불교는 결코 사회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한 과감한 폭로와 철저한 부정은 인류에게 자아 인식의 거울을 끊임없이 제공하였고, 인류가 부단히 자신의 행위를 조정하고 시정하도록 격발하고 자유와 행복의 참된 길을 찾도록 했다(천샤오밍 외, 『근대 중국사상사 약론』, 그린비, 2008).” 과감한 폭로와 철저한 부정, 이로써 종국에는 세계까지도 부정한 장타이옌이었지만 그는 바로 그 “부정에서 세계의 본질을 보고, 자유를 만끽하고자”(206쪽) 했다. 이 책 『불교와 무의 근대』는 장타이옌이 마주하고 실천했던 그 ‘무’를 살피는 책이다.

진화는 없다 - 장타이옌의 진화론 비판

『소보蘇報』사건(본문 37쪽 또는 책 앞날개 참고)으로 인한 3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쑨원이 있는 도쿄로 향한 장타이옌이 그 해에 처음으로 발표한 글의 제목은 「구분진화론俱分進化論」. 근대 시기 세계 어디서나 진화론은 지식인들에게 핫이슈였다. 그것은 이제 막 감옥에서 출소한 장타이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당대 중국의 누구보다도 더 날카롭게 진화론의 허점을 비판했다. ‘구俱’는 같음을 ‘분分’은 다름을 의미한다. 진화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공통[俱]되지만 그 방향은 전혀 다르다[分]는 것이다. 장타이옌은 진화는 상반된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선도 진화하지만 악도 진화하며, 쾌락이 진화하면 고통도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당시의 중국 지식인들과 달랐던 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사회진화를 통한 역사발전을 꿈꾸었으며, 특히 량치차오와 같은 이는 황인종인 중국 인종이 진화를 통해 백인종에 가까워지거나 백인종을 추월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한없이 낙관적인 진화론에 열광했지만 장타이옌은 이것의 실현 여부를 떠나 진화의 논리 속에는 증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결코 윤리적으로만 작용하지 않을 것을 간파했다. “옷 입고, 밥 먹고, 잠잘 때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방법이 부족하면 서로 다투고 죽이는 행위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사혹론四惑論」이라는 글에서는 유식불교(세계는 오직 식識의 작용으로 구성된 것이며 이것의 공空함을 깨닫는 것을 수행목표로 삼은 불교)의 개념을 빌려 ‘진화란 없다’고 주장한다. “진화란 본래 아뢰야식의 미망이 구성한 것이지 실제로 진화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식으로 봐도 일체 물질은 근본적으로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다. 이쪽에서 보면 진화할지 모르지만 저쪽에서 보면 퇴보일 뿐”(61쪽)이라며 도대체 뭘 진화라고 하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장타이옌이 이 글을 쓴 지 100년이 넘게 흘렀고, 량치차오의 바람처럼 중국 인종이 백인종에 매우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장타이옌의 질문은 계속된다. 도대체 뭘 진화라고 하는지, 무엇이 진보이고 발전이라고 하는지 말이다.

정부도, 인류도, 세계도 없다 - 장타이옌의 불교이상론

량치차오에게 있어 그가 신봉하는 진화론의 해피엔딩은 ‘장차 중국 인종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는 ‘장차 실력으로 전 세계를 개척하고 통솔할 자’는 ‘바로 우리 중국 인종’이라며 ‘남미와 아프리카는 의심할 바 없이 반드시 황인종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 국가와 국가를 위해 투신할 수 있는 국민이 필요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은 자아[我相]에 대한 집착을 극복해야 했고, 그래서 량치차오는 여기에 불교 논리를 끌어온다. 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획득되는 법신法身이 국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량치차오와 장타이옌의 행보가 갈린다. “탄쓰퉁이나 장타이옌이 혁명자의 도덕으로 그것(아상 극복)을 사용했다면 량치차오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희생으로 사용한다.”(175쪽) 그것은 국가관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국가가 그 자체로서 순수한 생명이며, 개인을 초월하는 인격체로 생각했던 량치차오와 달리 장타이옌은 ‘국가가 근본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단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늘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자각하라고 촉구’한다. 장타이옌이 보기에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개인은 지천으로 깔린 풀을 두고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먹을 곡식을 위해 쟁기를 끄는 소의 모습(91쪽)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는 일면 인정한 장타이옌이었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로써 대의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의심하고 부정한다. 그는 1908년에 발표한 「대의제가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한때 지지했던 공화제에 대한 입장을 철회하면서 ‘의회는 간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인민주권은 오히려 대의제 때문에 소멸’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선거가 ‘인민의 의사를 대표할 능력 있는 인물[賢良]을 뽑는 것이 아니라 귀족이나 토호가 권력까지 합법적으로 획득하게 하는 장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가 경계했던 것은 상업자본가가 정치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이들이 의회로 진출할 경우 과거의 귀족들을 대신한 자본가들이 인민들에게 새로운 억압으로 다가올 것이며 그럴 바에야 차라리 평등한 전제정치가 낫다고 장타이옌은 생각했다. 자본의 불균형이 정치적 불평등을 야기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제 아무리 보편이라고 한들 그것이 동아시아로 이식될 때에는 명령이나 억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어떤 것도 장타이옌에게는 최선이나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진화론도 그랬고, 의회제도도, 당시 힘을 얻어 가던 맑스의 이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는 오무五無를 이야기한다. 무정부에서 시작하여 무취락, 무인류, 무중생, 무세계에 도달해야 한다. 무정부를 이루려면 취락을 없애야 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인류를 없애야 한다. 인류를 없애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를 반성하고 부정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결국 ‘나’도 없다 - 장타이옌의 무아의 윤리

장타이옌이 감옥에서 나와 도쿄로 갔을 때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수천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 (이 속에 루쉰도 있었을 것이라 한다) 앞에서 연설을 한다. 그가 혁명을 위해 유학생들에게 강조한 두 가지는 종교와 국수國粹였다. 종교는 당연히 불교를 말한다. 그는 불교를 통해 청년들에게 ‘자신을 의지하지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은 본래 외롭게 태어난다. 다른 것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조물주란 존재하지 않고 명령자는 있을 수 없다’(151쪽)고까지 한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성리性理나 천리天理에서 벗어난 당시의 개인들은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공리功利의 세계로 수렴되고 있었다. 이 공리의 세계에서 개인들은 마음대로 살아서도 안 되고 죽을 수도 없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부정하기 위해 국가의 임의성을 고발하고, 개체를 내세운다.

장타이옌이 내세우는 개체는 그의 글 「인무아론」이나 「오무론」에 보이듯이 초월하는 개체, 즉 ‘무아’를 말한다. 이는 선언함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인식론?존재론적으로 자신을 변화시켰을 때에야 가능하며, ‘통념적 인식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이고,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한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이다(213쪽).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부터 취락, 인류, 중생, 세계를 모두 ‘무’화시킬 수 있는 힘도 바로 ‘무아’다. 무아는 ‘나’를 깨뜨림으로써 오히려 철저한 타자가 됨으로써 윤리가 된다. 분별을 타파하여 지혜를 획득하는 것, 단절과 불연속을 통해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 그럼으로써 끊임없이 자기의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것, 이것이 장타이옌이 주장했던 무아의 윤리였다. 그리고 장타이옌이 가리키는 윤리의 지점에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윤리’라고 하는 것의 빈약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공공도덕이니 법이니 하는 이름으로 적절한 선에서 대중 간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그 윤리를 계속 그러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지 혁명가 장타이옌은 묻고 있다.

저자: 김영진 1970년생.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근대사상가 장타이옌의 불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2007), 『공이란 무엇인가』(2009), 『근대 중국의 고승』(2010)을 썼고, 『중국 근대사상사 약론』(2008)과 『대당내전록』(공역, 2000)을 번역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에서 HK연구교수로 근무 중이다.

출처 : 그린비 북리뷰

2012-04-13 / 2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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