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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 그는 누구인가?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일지 스님 지음 『경허 -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선함과 악함이 부처와 호랑이보다 더하신 분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돌아가셨으니 어느 곳을 향해 떠나셨는가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 (만공 월면)

만공이 스승의 입적 소식을 듣고 〈경허법사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聞鏡虛法師遷化吟)〉 라는 시를 읊었다. 만공이 써 내려간 시에서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는 구절에는 제자 만공이 파악한 스승 경허의 고독했던 일생을 함축하고 있다. 술은 세속의 술이 아니다. 꽃밭은 세속의 꽃밭이 아니다. 경허의 술은 자신을 이류중행(異類中行, 중생 속으로 들어가다)에 몰아넣기 위한 미망의 술이며, 꽃밭은 경허 자신이 선택한 가시밭이다.

경허는 삼수갑산에서 쓸쓸히 입적했다. 당시 경허의 저고리 속에는 다음의 게송이 들어 있었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
속인도 아니요 중도 아닌 송경허라
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
세상 떠난 슬픈 소식은 흰 구름에 부치노라

경허선사가 열반한지 100년이 되었다. 곳곳에서는 경허선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경허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경허, 그는 누구인가?

느닷없이 제자와 길을 가다가 아낙에게 입맞춤을 하고 줄행랑을 치고, 술이 좋아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승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비도(非道)적인 모습이 그의 전부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불결한 피가 흐르는 한 선조의 존재를 감추려는 후손들처럼 쉬쉬하며 경허의 삶과 선(禪)을 묻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경허의 존재는 거대해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아직도 한국불교에 큰 자국을 남기고 있다. 현재 한국선이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에도 정작 경허는 막행막식의 기행을 일삼은 파계승, 선문의 이단자로 외면당하고 있다.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미치광이’ 쯤으로 여기는 이도 있다.

경허는 봉건적 잔재를 깨부수고 오염된 조선불교를 깨끗이 씻어냈다. 경허를 통해 한국불교는 다시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경허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들이 주도한 1954년 이후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현대 한국불교가 그 목소리를 가진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불교는 선구자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허는 잿밥에만 골몰하며 목탁을 두드리던 구한말 불교계에 선의 정신과 선종교단으로서 한국불교가 지녀야 할 전통의 복원을 이룬 인물이다.

만공이 스승 경허에게 물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합니다만, 스님은 왜 그렇게 술을 드시는 겁니까?”

경허는 만공의 말꼬리를 끊으며 말했다.

“허 참, 자네는 아주 도가 높네 그려. 나 같으면 술을 먹고 싶으면 가장 좋은 밀씨를 구해서 잘 키워 술을 빚어서 마시고 또 마시겠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해다가 잘 가꾸어서 파전을 먹고 또 먹겠네.”

실종자 경허, 프로메테우스 경허

경허는 무너져 가는 조선을 걱정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누어도 편치 않구나’라고 노래한 우국(憂國)의 선승이었다. 경허는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허는 실종자이기도 하다. 경허의 실종과 불귀(不歸)는 망국(亡國)의 조선, 식민지 대한제국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너무도 조선적인 비극이 응축되어 있다.

경허의 생애가 후대에 전해지고 검토되는 기준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전승과 기록으로 전해지는 전기(傳記)가 있다. 기록으로 남겨진 전기는 연대(年代)와 그 인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갖추어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구전된 이야기들은 선사로서의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고 때로는 엉뚱하기조차 하다.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은 현대 한국선의 달마, 경허에 관한 필자의 오랜 그리고 절실한 사랑의 기록이다. 필자는 이 평전을 쓰기 위해서 수년간 인간 경허, 시인 경허, 선승 경허의 체류지를 답사했으며, 경허선(鏡虛禪)의 세계를 축약하여 전하는 1943년판 원본 《경허집(鏡虛集)》을 몇 번이고 숙고하며 읽었다고 한다. 필자는 경허의 길을 추적했으며, 경허 스스로 이단자라는 운명을 감수하고 저 북방고원에서 방랑자로 쓸쓸히 소멸했는지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선의 탐구자들은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경허를 둘러싼 진부한 소문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오직 경허의 선과 인생을 알고자 하는 소수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민족사 펴냄 / 352쪽 / 13,000원
출처 : 출판사 서평

2012-04-27 / 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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