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조선태조어진은 국보 지정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을 국보로,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扶餘 王興寺址 舍利器 一括)’ 등 3건의 유물을 보물로 각각 지정했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은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다. 당대 최고의 화사들이 동원되어 원본에 충실하게 이모(移模) 작업이 이루어져 조선 초기 선묘 위주의 초상화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대규모의 화면, 표제(標題)와 장황(粧?), 용문이 직조된 풍대(風帶), 낙영(絡纓)과 유소(流蘇) 등이 온전하게 구비된 상태로 진전(眞殿·선원전의 다른 이름) 봉안용으로서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완전한 형태의 어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에서 조선 시대 왕의 전신상으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더불어 이 어진과 관련된 ‘경기전의(慶基殿儀)’,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 등의 자료를 통해 어진 제작의 전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조선태조어진’은 1987년에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었고, 예술적·학술적 가치는 물론 상징적인 가치도 높아 이번에 국보로 승격됐다.
보물 제1767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扶餘 王興寺址 舍利器 一括)’은 부여 왕흥사지의 목탑지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에서 발견됐으며, 가장 바깥에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으로 만든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중첩하여 안치한 3중의 봉안 방식을 취하였다.
청동제 사리합 외면에는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6행 29자의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은 사찰의 건립시기, 사리기의 제작 시기와 사찰의 건립 배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는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사리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제1768호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白磁 靑畵 興寧府大夫人 墓誌 및 石函)’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일대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에서 백자 지석(誌石) 6장이 석함에 담긴 채로 발견됐다. 6장의 백자 지석 중, 맨 앞과 뒤의 지석은 순백자이며, 가운데 4장은 청화(靑畵)로 묘지의 주인공인 인천 이씨(세조의 장모이자, 정희황후의 어머니)의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와 후손들의 현황 등을 적고 있다. 이 4장의 뒷면에는 순서를 1장(一張)~4장(四張)이라고 청화로 적어두었다.
이 묘지가 제작된 경태(景泰) 7년은 1456년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백자 청화의 제작시기 중 가장 이른 예로, 백자 청화의 개시 시기와 편년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더불어 후대에 제작된 백자 묘지들과는 규격이나 번조법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커다란 석함에 공간을 마련하여 매납한 형식도 특이하다. 백자 지석의 초기 제작 양상과 매납법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 가치가 크다.
보물 제758-(2)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는 권말에 수록된 최이(崔怡·?~1249)의 지문(識文)을 통해서 이 판본의 제작 동기와 1239년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최이에 의하여 주자본(鑄字本)을 번각(?刻)하여 간행한 목판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 판본의 판각시기인 1239년보다 앞선 시기에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이 전래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지문을 통해 우리나라 초기 금속활자인쇄술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더불어 불교학과 서지학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크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조선태조어진’과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등 보물로 지정된 3건의 문화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관보(http://gwanbo.kore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출처 : 문화재청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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