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지음 『불교 하는 사람은』
우리는 ‘불교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과 함께 ‘불교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도 자주 씁니다. 불교는 ‘믿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차별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실천할 때 내가 변하고, 내 주변이 변하고, 우리 사회가 변하고, 모든 생명의 세계가 변합니다.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며, 평화로워집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불교신문〉을 통해 매주 한 번씩 ‘실천불교’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였습니다. 그러한 글들이 불교를 신행하고 실천하는 분들에게 지침이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편 한 편 온 정성을 기울여 원고를 작성하였고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서 총 48편의 글이 모였습니다.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생물학, 사회철학, 뇌과학, 논리학, 윤리학, 역사, 유교, 심리상담, 정책결정, 정보통신문명, 생명윤리, 종교의례 등 다양한 분야와 접목하여 불교를 풀어보았습니다. 고정 지면을 사용하는 연재물로 분량에 제한이 있었기에 각각의 주제에 비해 글들이 압축적이고 호흡이 밭긴 하지만, 뻔한 내용을 담은 글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아울러 필자가 각종 지면에 기고했던 글들 가운데 불교의 실천과 관계있는 열다섯 편을 추려서 ‘불교와 사회’라는 제목으로 묶었고, 일부 잘못된 권력자들의 종교편향에 항거하며 2008년 8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던 범불교도대회 즈음에 기고했던 글들과 우리 불교의 현재와 미래를 담은 글 몇 편을 ‘파사현정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모았으며, 끝머리에는 《참여불교》에 실렸던 ‘대담’ 기사를 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주요 관심사와 의제들에 대해서 ‘불교 하는 사람은……’에 대한 희망을 김성철 교수가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을 담아 쓴 불교시론집이다. 김성철 교수는 이 책에서 불교를 ‘믿는 불교’, ‘하는 불교’에 대한 고민과 불교를 응용하여 우리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 즉 보시와 지계, 그리고 수계와 생명윤리, 수행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많은 점들을 서로 알고 논의하고자 하였다.
또한 불교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조그마한 부분에서부터 거대 담론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논의되어야 할 것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시대의 불교의 역할, 청년실업문제, 환경문제 등에 대해 불교인으로서 말하고 있다. 끝으로 지식으로서의 교학체계가 아니라 삶의 좌표로서의 연구 자세를 대담형식으로 진지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통념이나 이웃 종교의 가르침 가운데 부처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천성산 터널이나 4대강 사업에서 보듯이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태도의 경우 비불자들의 생각은 불자들과 판이하게 다르다. 전통과 현대의 갈등, 남북통일의 문제, 바람직한 정치체제의 문제, 생명공학과 윤리의 문제 등등에 대해서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지침으로 삼아서 다른 누구보다 탁월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불교적인 결혼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불교인들은 제사나 차례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불교적 사회참여란 무엇인지? 불전의 가르침을 지침으로 삼아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는 실천의 종교다〉
세속의 사회에서는 권력과 금력의 우열에 따라 사람의 서열을 매기지만 승가사회에서는 세속과 상반된 가치체계로 그 구성원의 서열이 정해진다. 가장 선량하고, 검소하고, 자비롭고, 청정하고, 지혜로운 수행자를 최정상에 모신다.
“정승집 말이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안 간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세속의 권력과 금력에 대한 복종은 겉모습뿐이다. 그러나 지계청정한 스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심은 속이든 겉이든, 오늘이든 내일이든 한결같다. 그런 삶을 사시는 모습만 보고도 세파에 지친 이들은 너무나 큰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각박한 신자유주의의 가치관에 대해서 불교는 해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중화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불교의 본분이다. 부처님 당시에 그랬듯이, 승가가 세속과 상반된 삶의 모습을 시현할 때 불교는 가장 흥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불교가 흥하려면〉
몸놀림이 적고 그 속도가 느릴수록 윗분으로 대접받는 조선시대였지만, 불교집안에서만은 노동을 소중하게 생각해왔다. 이름 없는 스님들의 노동을 통해 사찰 주변의 경작지가 계속 넓어졌다. 미투리나 종이와 같은 공산품 생산의 중심지가 사찰이었다. 불교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복덕의 길과 지혜의 길이다. 지혜만 닦으면 아라한이 되고, 복덕만 닦으면 전륜성왕이 되며, 복덕과 지혜를 모두 갖추어야 부처가 된다고 한다. 《대지도론》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성불을 위한 복덕의 자량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육체노동이다. 육체노동을 통해 남에게 이로움을 줌으로써 내 마음 밭에 복덕이 쌓이게 되고 육체노동의 노고로 인해 과거나 전생의 업장이 씻어진다. 실명한 아나율 존자의 바느질을 도우시며 보시 공덕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부처님의 가르침,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시던 백장선사의 가르침 모두 ‘육체노동의 공덕’에 대한 대승적 조망을 담고 있다. 육체노동의 보시행은 남에게도 기쁨을 주지만, 나에게도 이익을 주는 길이다. 놀고 있는 희고 고운 손은 부끄러운 손이다. 〈희고 고운 손을 부끄러워하자
불교시대사 / 256쪽 / 1만 3500원
출처 :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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