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승 스님(조계종 총무원장)
우리는 다종다양(多種多樣)이라는 말이 적합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다종다양의 하나하나를 헤아리다 보면 손쉽게 열 손가락을 훌쩍 넘어버린다. 같은 종류라고 해도 같은 모양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손전화 하나만 하더라도 한 회사에서 나온 것이 수십 수백 종을 헤아리니 도대체 같은 모델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자기 식의 장식을 더하고 나면 같은 회사 같은 모델이라는 느낌조차도 들지 않는다.
우리네 살림살이의 실상도 다를 바가 없다. 살림은 한 집 살림인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종류와 모양새가 다 제각각이다. 종류와 모양새만 아니라 생각까지 더하고 보면 천차만별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천차만별이 모였으니 당연 다툼이 있을 밖에 없다.
가전연 존자가 바라나 마을의 한 숲에 머물고 있을 때 바라문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다.
“세상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왕이 싸웁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바라문과 바라문도 싸웁니다. 재산이 많은 장자들도 싸웁니다. 이들은 왜 싸우는 것입니까?”
“왕과 왕이 싸우고, 장자와 장자가 싸우는 것은 탐욕에 매이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집을 나온 수행자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싸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수행자와 수행자들이 싸우는 것은 자기 생각에 매이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인즉 이해 관계의 다름 때문에 다투고, 생각(이념)의 다름 때문에 다툰다는 것이다. 그 다툼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서는 지극히 정형적인 답이 주어진다. ‘나’라는 것,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벗어 던지면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논리적 전개는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끌어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는 집착을 내던진 삶을 살고 있는가? 그래서 다투지 않는가? 그렇지 못한 것이 대개의 현실 아닐까.
이유는 자명하다. 결론은 알고 있지만 과정에 대해서는 무지한 까닭이다. 서로가 서로의 결론을 알고 있지만,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까닭이다. 아니 무관심한 까닭이다.
더불어 다툼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서로 간의 다툼을 통해서 상대방이 결론에 이른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오히려 다툼은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다툼은 다툼이 없는 곳에 이르기 위한 충실한 과정이어야만 한다. 이 사소한 원칙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다툼을 위한 다툼에 매몰 되어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에 부닥치게 된다.
‘권수정혜결사문’에 “땅에 넘어진 사람은 다시 그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과정을 무시하고서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한다. ‘충실하게’ 다투지 않고서는 다툼이 없는 곳에 이를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한다. 혹여 쉽게 오해하고 쉽게 비난하여서 ‘충실치 못하게’ 다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둘러볼 일이다. 그래서 발 딛고 선 현실이 아니라 허상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버리고서야, 깨침의 관문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51호(2006년 3월 18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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