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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학은 근대의 산물”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조성택 지음 『불교와 불교학 - 불교의 역사적 이해』

불교의 역사적 이해『불교와 불교학』.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 그리고 '불교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왔는가를 살피고,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근대 불교학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짚어낸 책이다.

유럽의 ‘불교’ 발견과 근대 불교학의 탄생

“근대 이전 우리에게 불교는 있었지만 불교학은 없었다. 불교학은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의 불교인들은 다양한 지역 전통의 ‘여러 불교’buddhisms를 조감해서 ‘하나의 역사’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교 이해는 각 지역 전통이 제공하는 유사 역사quasi-history(類似歷史)와 불교적 가치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불교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아니라 지역 전통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고 재현하느냐의 문제였다. 전통 교학이 바로 그것이다.

다양한 지역 불교의 전통을 그 기원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역사’로 조감하는 작업은 19세기 중반 이후 전통적인 불교 문화권을 식민지로 경영하던 유럽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붓다를 역사적 ‘인간’으로 되돌려 놓고 사라진 ‘불교’를 고대 사회로 소급해 역사적 실체로서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이 문헌학, 종교학, 고고학 등 다양한 근대 학문 분야의 분업 또는 협업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신화와 역사가 혼재해 있던 불교의 모습이 비로소 ‘역사’로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불교 사상과 교리에 대한 ‘유럽적 해석’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근대 불교학의 탄생이다.

불교에 대한 ‘유럽적 해석’은 ‘불교학’Buddhist Studies의 이름으로, 그리고 ‘근대 학문’의 한 상징으로 20세기 초 일본을 기점으로 동양에 역수입되었다. 오늘날 불교와 불교사에 대한 우리의 인문 교양적 지식의 대부분은 유럽으로부터 수입되었던 근대 불교학의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는 우리의 ‘오랜 전통’이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지식은 유럽에 의한 근대의 산물인 셈이다.

근대 불교학의 식민주의적 성격

이러한 근대 불교학을 통해 고대 불교사를 재구성하고 다양한 불교 전통의 형성과 역사적 전개과정을 상당한 수준까지 조감하는 시야가 확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근대 불교학은 태생적으로 식민주의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유럽인들에게 불교는 동양의 타자(他者)였으며, 현재가 아닌 과거였다. 즉, 동양의 ‘현재’ 종교가 아니라 그들의 도서관에 소장된 문헌 속에 존재하는 ‘과거’였다. 이렇게 문헌학 중심의 편향된 연구방법론은 동양의 ‘현재 불교’가 아니라 문헌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불교’에 집중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는 피식민 국가들의 ‘우울한 현재’와 ‘화려한 과거’를 선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럽의 식민 지배를 용인하고 정당화하는 무의식적 논리 기반을 제공하였다.

또한 근대 유럽이 재구성한 초기 불교사는 철저한 문헌 비평과 문헌 실증주의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유럽적 상상력과 암묵적 전제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저자는 그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균열을 드러냄 보임으로서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근대 불교학이 초기 불교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 출발점이자 결론으로 상정하는 한 가지는,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하나’의 교단에서 출발해 여러 다양한 교단으로 분열되었으며, 불교 경전 역시 ‘하나’의 텍스트로부터 다양한 텍스트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시 기독교와 그후의 전개과정에 대한 당시 유럽인들의 역사적 이해를 그대로 불교사에 투사한 것이며, 베다 문헌을 구전 전승한 브라만교의 전통이 초기 불교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붓다 자신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다양한 지방어를 통해 전달할 것을 당부함으로써 특정한 경전 언어의 배타적 사용을 거부했다. 불교에서 경전은 축어적 전승을 통한 신성성의 유지와 보존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기록되고 전달되는 소통성에 그 중요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 경전은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된 다양한 전개가 아니라 애초에 여러 기원과 다양한 언어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불교에 대한 이해 역시 철저하게 ‘유럽적’이었다. 불교 경전은 근대적인 합리적 이성의 시각에서 재해석되었다. 불교의 깨달음은 근대적 계몽 이성에 유비(類比)되었다. 번뇌는 식혀야 할 ‘열정’passion으로 이해되었으며, 깨달음은 일종의 ‘정신적 게몽 상태’spiritual enlightment였다. 이런 맥락에서 붓다Buddha(覺者)는 차가운 ‘열정’의 이성적이며 이지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 인간’Victorian ideal of humanity으로 재해석되었다. 저자는 한국을 비롯한 현대 불교학자들의 연구가 거의 전부 빅토리아 시대에 형성된 ‘이성주의적 또는 합리주의적 연구방법론’에 기초해 있음을 지적하면서 불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 새로운 경전 독법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근대 불교학과 동아시아 근대 불교의 형성

근대 불교학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여파는 전 불교권에 미쳤다. 유럽의 눈을 통해 재구성되고 재해석된 불교는 이제 근대 공간에서 동아시아 불교가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일본은 1876년 난죠 분유南條文雄 와 가사하라 겐주 笠 原硏壽가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은 산스크리트어 불전 연구를 위해 서구에 지속적으로 유학생을 파견했다.

조선의 경우에도 1924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불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백성욱이 유럽의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경전 연구 동향을 소개하였으며, 프랑스에 유학했던 김법린은 1932년 산스크리트어 원전 연구를 바탕으로 원전 번역을 연재했으며 프랑스의 불교학 동향을 소개했다.

이들 동양의 불교 지식인들은 근대 불교학의 성과에 일방적으로 압도되었으며, 근대 불교학을 통해 비로소 불교를 ‘근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 불교가 근대 유럽에서 ‘발견’된 것 또는 유럽적 ‘구성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불교가 본래 ‘근대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불교는 당시 기독교와 대척점으로 여겨지던 과학, 이성, 철학 등과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는 ‘전통’이지만 가장 근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한, 중, 일 삼국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근대 불교’를 기획하였으며, 이는 동아시아 근대 불교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 근대 불교사의 비판적 이해

조선 왕조 500년 동안의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1895년 비로소 ‘합법적인’ 활동 공간을 얻은 조선의 불교인들은 근대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사회적 유용성을 증명하기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전개했다. 승려들을 위한 근대적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교과 과정에 철학, 종교학, 역사학, 지리학과 같은 근대 학문을 포함하였으며, 당시 활발한 선교활동을 시작한 기독교와 일본 불교의 포교 활동에 자극을 받아 병원 설립, 교도소 포교 같은 근대적 복지 사업을 시행하기 했다. 그런 가운데 때로는 스스로의 전통을 부정하는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만해의 염불당 폐지나 대처식육帶妻食肉 같은 주장은 그 대표적인 예다. 만해의 이런 주장을 지나치게 조선 불교의 왜색 불교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가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저자는 근대 불교를 항일-친일의 도식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편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근대 불교사 전체를 ‘항일 민족의식’과 ‘전통 수호를 통한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근대기 동안 한국 불교인들의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이며, 현재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의 성립을 한국 근대 불교의 완성으로 보고자 하는 일종의 ‘목적론’적 역사 기술이다. 저자는 한국 근대 불교사의 전체상을 포착하기 위해서 ‘딜레마’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19세기 말 이래 조선 불교가 처했던 딜레마는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 불교의 정체성’이라는 두 과제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대립 관계로 설정되었던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적 정체성‘의 문제는 해방 이후의 곡절 속에서 왜색 불교 대 민족 불교의 문제로 단순화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은 흔히 대처-비구의 갈등으로 알려졌지만, 그 실상은 다수파와 소수파의 갈등이었다. 다수파에는 대처승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비구승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파는 근대 교육을 받은 대처승들의 전문성을 활용함으로써 불교의 근대적 유용성을 확장해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 비구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청정 수행 전통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구승만으로 구성된 소수파는 ’친일 청산‘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왜색 불교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다수파에 속한 대처승들을 종단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출가승 중심의 조계종단이 성립되는 이러한 역사 과정은 한편으로 대처승들이 현실 불교의 중심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불교학이 현실 불교와 유리되어 대학에서 강의와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베개 / 352쪽 / A5 / 1만 5000원

출처 : 출판사 서평

2012-08-28 / 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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