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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은 열매보다 과정이 중요”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현웅 스님(미국 버클리 육조사 주지)

‘자기 안의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를 잊어야 한다.’는 이치를 믿고 명심해야 합니다.

불자 여러분들은 “천수경, 금강경 등 부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 환희심이 나는데 왜 내 안의 부처님을 만나려면 내가 아는 부처님을 잊어야 하는가.”라는 반문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안의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를 잊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옛 선사들의 말씀에 ‘부처가 부처를 못 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처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습기가 부처님을 믿기 전에 이미 익혀온 습관대로 살고자 해서 마음이 안주를 못하고 떠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마음먹기 따름이기 때문에 착한 마음을 갖고 바르게 살면 절에 가지 않아도, 종교를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먹기에 달렸다.’와 일반인들이 말하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다른 의미입니다. 이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그 말의 내용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마음이 오래 못 가고 쉽게 변해버립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변명하게 되고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자기가 해 놓은 일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합니다.

여러분들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많은 교과서와 상식과 도덕과 역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교과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게 인생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또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배운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 와서 스님들이 행자 때부터 교육받아서《초발심자경문》등 경전을 배우지만 막상 참선방에 들어서면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생이 마음이 혼란하기 때문에 일단 부처님의 말씀을 배워서 믿고, 믿다 보면 내 습기가 쉬게 되고 그 쉬는 틈을 타서 자기 안의 부처님의 싹이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자기 안에 있는 부처의 성품을 믿어서 자기의 어리석은 습관을 쉬는 것입니다. 쉴 때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꿔지면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처음에 말씀한대로 내 안의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기억하고 있는 부처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우리 안의 부처가 탄생하기 위해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과 배운 것이 맞아 들어갈 때 우리는 마음을 놓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증명하다 보면 날마다 생활이 즐겁습니다. 이와 불교의 교리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내 안의 부처를 경험하게 되면 귀도 부처님의 귀로 듣게 되고 생각도 부처님의 생각대로 하게 되고 보는 것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이웃 사람과 대화하면서, 옆집 부부싸움 소리를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불보살의 가르침으로 듣게 됩니다. 불보살이 문수, 보현, 관음보살이 따로 형상이 있어 나타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날마다 대하는 가족과 친구가 될 수 있어 가르침이 전해집니다.

따라서 불교는 우리가 사는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불교만이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불교만이 세상 사는 것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느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내 안의 부처를 만나기 위해 나를 돌아보게 되고, 내 나쁜 습관이 없어지게 되고, 나를 항복 받게 되고, 속에서 환희심이 나면서 보고 듣는 생각에 다툼이 없어지고, 이 세상이 불보살과 불국토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 계는 부처님의 행이며,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므로 선을 깨달으면 부처님의 마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불은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부처가 말한 깨달음의 성질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데 그것이 바깥의 어리석음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고향을 가지고서도 고향을 등졌기 때문에 혼란 상태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본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작업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날마다 살아 숨쉬고 있으면서 그것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할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30년간 하면서 선(禪)이 왜 잘못 전해지고 배척을 받는지, 또 왜 실패하게 되는지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스님이 배운 것은 있어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막상 암에 걸리니 삶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절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길까요.

육조 스님이 말씀하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육조 스님이 정성 드려 피어낸 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꽃만 꺾으려고 하지 육조 스님이 꽃을 어떻게 피웠는지를 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 꽃을 어떻게 피웠는지 헤아려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성불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은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노모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나무를 패다 부모를 봉양했는데 효를 지극히 들이다 마음이 맑아지고 항상 푸른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듯이 밝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효에 의해 마음을 닦아 명상 상태가 되어 깨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깨달은 육조 스님의 말만 따다가 써먹기 때문에 선이 배척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깨달은 꽃만 갖고 향만 맡으려 하고, 정성을 드리지 않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기 때문에 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는 육조스님처럼 머리에 지식을 채우기 전에 믿음을 키우고 정성 드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내 안의 부처의 싹을 키우기 위해 지식인 아닌 지혜를 쌓으면 불교가 곧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실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88호(2003년 8월 9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2011-03-11 / 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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