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지리산 화엄사에서, 2천여 대중 참여
도천당 도천대종사의 영결식이 10월 2일 오전 10시 지리산 화엄사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은 원로의원 밀운, 진제, 혜승, 고우, 고산, 정관, 암도 대종사 등과 교육원장 현응스님, 포교원장 혜총스님, 호계원장 법등스님과 전국 교구본사 주지스님 등 2천여 사부대중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영결식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도림 법전예하께서는 법어(원로의원 진제스님 대독)를 통해 “종사(宗師)는 번뇌 속에서 푸른 눈을 열어 임제(臨濟)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불어넣은 우리 종문의 눈 밝은 본분종사(本分宗師)이자 거인(巨人)이었다.”고 대종사의 행장을 추모했다.
원로회의 의장 종산스님은 영결사(원로회의 부의장 밀운스님 대독)를 통해 “스스로 몸을 비워 환귀본처(還歸本處)하는 것이 진리의 당체(當體)라지만 치열한 수행의 사표요, 자애로운 스승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으니 후학들은 못내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습니다.”라고 추모하고 “이제 와서야 스님께서는 우리 곁에 가장 가깝게 머물다 가셨던 선지식善知識이었음을 알고 자책하며, 수미산에서 부처님 시봉 끝나는 날, 부디 사바세계에 다시 현신하시어 무량한 자애로 어두운 후학들을 성성하게 일깨워 주소서.”라는 말을 전했다.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추도사(포교원장 혜총스님 대독)를 통해 “큰스님께서는 스스로를 태고사의 머슴이라 낮추시며 일과 공부가 둘이 아닌 수행의 경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으니 이理와 사事에 무애한 도인의 모습이 바로 큰스님의 진면목이십니다.”며 “육신의 편리함을 멀리하고, 검박하고 절약하는 가운데 평등을 구현하였으며, 나보다 남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신 큰스님은 주인과 머슴이 따로 없는 경지를 보여주셨으니 이제 수미산 주인집의 주인이 되셨습니다.”라며 도천대종사의 수행과 가르침을 추모했다.
호계원장 법등스님은 조사를 통해 “큰스님께서 비록 원적하셨으나, 스님의 가르침 밝고 분명하니 후학들이 높이 받들어 공양하고 따를 것이며, 납자 모두가 장부일대사를 해결하고 그리하여 이 땅이 다시 영산회상이 되고 소림의 풍류가 넘쳐흐르도록 백척간두에 서서 진일보하는 힘과 용기로 정진할 것을 다짐합니다.”며 “큰스님께서 부디 이 세상에 불보살로 다시 오셔서 어리석은 후학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시고 다시 한 번 불조의 혜명이 이 땅에 현현하도록 하소서. 사바세계를 환히 비추소서.”라며 조문했다.
문도대표 명선스님은 “오늘 영결식에 참석해 주신 스님과 신도분들께 감사드리며, 도천스님의 유지대로 화엄사 대중들은 화합하고 더욱 분발 정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경책을 부탁드립니다.”며 영결식장에 참석한 사부대중께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영결식이 끝난 후 도천대종사의 법구는 대웅전과 각황전을 향해 3배 올린 후, 인로왕번, 영정, 향로, 위패를 앞세우고 화엄사 연화대로 이운해 다비의식을 진행했다. 스님의 초재는 10월 4일(음. 9월 8일)이며 49재는 11월 15일(음. 10월 20일) 지리산 화엄사에서 거행된다.
도천대종사는 1910년 강원도 회양에서 출생, 1928년 세수 19세에 금강산 마하연에서 묵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금강산 마하연에서 보문, 성철 스님 등과 안거를 나셨고, 이후 신계사, 유점사, 표훈사, 장안사, 법왕사, 묘향산 상원 등 고찰을 두루 통방하시며 수행 정진을 거듭했다.
스님은 1954년 동산, 효봉, 청담, 금오 스님 등과 더불어 비구 정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1962년부터 금산 대둔산 청령골 끝자락에 소재한 태고사를 중창하셨고 태고사를 중건하는 정진 도중에도 제방의 납자들을 경책하시면서 정진을 게을리 하시지 않았다. 2004년 5월 31일 가야산 총림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서 받았다.
도천대종사는 출가 이후 80여 성상을 지내면서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백장청규와 일하는 것이 곧 수행이라는 노동선(勞動禪)의 정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시던 모습 속에 대도인의로서의 풍모와 가풍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스님은 2011년 9월 28일 법랍 83세 세수 101세로 원적에 드시기 전 “나는 깨친 것이 없어 수미산 주인집에 머슴살러 갈거여.”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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