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용주사에서
원공당 정무대종사의 영결식이 10월 3일 오전 10시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에서 엄수되었다. 영결식은 원로의원 밀운, 진제, 고산, 월서, 혜승, 법흥, 혜정, 종하, 정관, 암도 대종사 등과 총무원장 자승스님, 교육원장 현응스님, 중앙종회 의장 보선스님, 호계원장 법등스님과 전국 교구본사 주지스님 등 천5백여 사부대중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영결식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도림 법전예하께서는 법어(원로의원 진제스님 대독)를 통해 “본분(本分)으로 임운자재(任運自在)하시니 모든 장애에 걸림 없이 오고 갈 것이며 부름이 있는 곳에는 그 모습을 나투어 은현자재(隱現自在)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기(一機) 일경(一境)을 통해 종사(宗師)의 일점영명(一點靈明)은 재재처처(在在處處)에서 나툴 것입니다.”라며 대종사의 행장을 추모했다.
원로회의 의장 종산스님은 영결사(원로회의 부의장 밀운스님 대독)를 통해 “평생 청빈의 삶을 이어오며 공부에 전념하셨던 대종사께서는 또한 그렇게 살아오셨기에 삶과 죽음도 이미 초월하여 생사에 자유로운 대자유인이셨습니다.”라고 정무대종사를 회고하며, “대중은 이제 더 이상 대종사의 그 가르침을 들을 길 없게 되어 슬프고 애달프겠지만, 대종사의 빈자리를 슬퍼하는 대신 대종사께서 일러주신 그 가르침을 받들어 조사 희롱에 놀아나지 않도록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기필코 나그네 세상 즐겁게 살아가도록 할 것입니다.”라며 정무스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지켜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추도사를 통해 “도천큰스님은 교와 선을 겸비한 큰 스승이지만, 큰스님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신도교육과 포교를 통한 대중교화를 위해 힘쓰신 일입니다.”며 큰스님의 포교원력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도천큰스님은 언제나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셨고, 항상 탁마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이 땅에는 스님의 감로법문을 청하는 중생들로 가득하니, 석남사 주련에 쓰신 글처럼 ‘서운산 아래 금광루에서 부처님 광명 다시 빛내기’위해 빛으로 돌아오소서.”라며 큰스님을 추도했다.
중앙종회의장 보선스님은 조사를 통해 “아직 큰스님의 따스하고 온화한 미소가 그대로 남아있어 도솔천 내원궁에 계실 스님의 법향이 벌써 그립습니다.”며 “이제 어느 곳에서 노사(老師)에게 현묘(玄妙)한 도리를 물어보고 낮은 문답으로 오묘(奧妙)한 요결(要訣)을 두르려 보겠습니까?”라며 큰스님의 원적을 추모했다.
영결식이 끝난 후 정무대종사의 법구는 인로왕번을 앞세우고 부모은중경탑과 경내를 요잡 후 생전 주석처인 안성 석남사 연화대로 이운해 다비의식을 진행했다. 스님의 초재는 10월 5일(음. 9월 5일)이며 49재는 11월 16일(음. 10월 21일) 안성 석남사에서 거행된다.
정무대종사는 1931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 1958년 군산 은적사에서 전강스님을 은사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스님께서는 한결같이 일상에서의 수행을 강조하셨으며, 용주사와 석남사에 한글부모은중경탑을 건립하는 등 효 사상을 고취하는데 많은 열정을 기울이셨다. 또한 대학생 수련회를 만드시고, 대구 정법거사림회, 한국관음회, 세무대학불교학생회, 경찰대학불교학생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 많은 단체의 지도법사로 활동해 오시면서 현대불교 포교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셨다.
정무스님은 웬만한 추위에는 방에 불을 넣지 않았고, 버스와 지하철로 법문을 다니면서 삼보정재를 아끼실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셨으며, 항상 수행자의 본분을 강조하시어 평생 방 청소와 빨래를 남에게 미루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셨다. 스님은 2011년 9월 29일 법랍 54년 세수 81세로 원적에 드셨다. 정무스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인연 따라 왔다가 바르고 정직하게 열심히 살다 간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우리 거기서 만나자.”라는 임종게를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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